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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별성 (행복한 삶을 위한 중요한 요소) 본문
사람들이 자유롭게 자기 의견을 가지고 또 그 의견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같은 자유가 허용되거나 강조되지 않으면 인간의 지적 발달과 그를 통한 도덕 생활이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된다. 이제부터는 똑같은 이유에서, 그에 따르는 모든 위험과 불확실성을 스스로 책임지는 한, 다른 사람에게서 일체의 물리적 도덕적 방해를 받지 않고 각자 생각대로 행동하는 자유가 필요함을 강조하고자 한다.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진다는 단서는 두말할 것 없이 매우 중요하다. 행동하는 것이 의견을 가지는 것처럼 자유로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 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옳지 못한 행동을 하도록 하는 데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상황이라면, 의견의 자유도 무제한적으로 허용될 수는 없다. 어떤 사람이 곡물 중개상들이 가난한 사람들의 배를 끊린다거나 사유재산은 강도 짓이나 다름없다는 의견을 신문 지상에 발표한다면, 이런 행동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곡물 중개상의 집 앞에 모여든 흥분 상태의 폭도들을 상대로 그런 의견을 개진하거니 그들이 보는 데서 그 같은 내용의 벽보를 붙인다면, 그런 행동을 처벌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어떤 종류의 행동이든 정당한 이유 없이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강압적인 통 제를 받을 수 있으며, 사안이 심각하다면 반드시 통제를 받 아야 한다. 나아가 필요하다면 사회 전체가 적극적으로 간섭 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개인의 자유가 심각하게 제한받게 된다. 그렇지만 사람을 성가시게 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이는 불가피하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문제에 대해 그들을 괴롭히지 않는 한편, 그저 자신에게만 관계 되는 일에 대해 자기 스스로의 기분과 판단에 따라 행동한다면, 각자가 자유롭게 자기 의견을 가질 수 있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책임 아래 남의 방해를 받지 않고 자기 생각에 따라 행동하는 자유가 허용되어야 한다. 인간은 오류 를 범하지 않는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다. 인간이 아는 진리란 대부분 반쪽짜리 진리일 뿐이다. 인간이 진리의 모든 측 면에 대해 지금보다 훨씬 더 잘 알 수 있을 때까지는, 의견일 지도 반대쪽 의견이 최대한 자유롭게 피력된 끝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면 바람직하다고 할 수 없다. 다양함은 나쁜 것 이 아니라 오히려 좋은 것이라는 사실은 개인의 의견 못지않 게 행동 양식에도 적용될 수 있다. 이 불완전한 상태에서는 서로 다른 의견이 존재하는 것이 유익하듯이, 삶의 실 협도 다양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필요하다. 다른 사람에게 피 해를 주지 않는 한, 각자의 개성을 다양하게 꽃피울 수 있어 야 한다. 누구든 시도해보고 싶다면. 자기가 원하는 삶의 양 식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 실천적으로 증명해볼 수 있 어야 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다른 사람들에게 중대하게 연 관되지 않는 일에서는 각자의 개별성이 발휘되도록 하는 것 이 바람직하다. 각자의 고유한 개성이 아니라 전통이나 다른 사람들이 행하는 관습에 따라 행동하게 되면, 인간을 행복하 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이자 개인과 사회의 발 전에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인 개별성을 잃게 된다.
이런 원칙을 지켜나갈 때 부딪히게 되는 가장 어려운 문제 는, 주어진 목표를 달성하는 데 필요한 수단에 대한 이해 부 족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에 대한 보통 사람들의 무관심이 다. 만일 개별성의 자유로운 발달이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데 특별히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이고, 문명• 지식• 교육• 문화 등과 같은 용어에 반드시 따라다니는 요소일 뿐 아니 라, 그 자체가 그런 모든 것들에 없어서는 안 되는 필요조건 임을 깨닫는다면, 자유를 가벼이 여기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개별성과 사회적 통제 사이에 적절한 선을 긋는 일 이 그리 어렵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보통 사람들 이 각 개인의 자발성이 얼마나 중요한 가치가 있는지, 또는 그것이 왜 소중한지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부분 의 사람들이 오늘날 인간의 삶의 모습에 만족하기 때문에그 들 자신이 바로 그런 삶의 주인공이라 그렇다) 왜 다른 모든 사람 들이 자기와 똑같이 살면 안 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더 심 각한 사실은 도덕과 사회 문제를 개혁하고자 하는 이들 다 수가 자발성을 그들이 추구하는 이상의 일부로 간주하기는 커녕, 인류에게 꼭 필요한 것을 성취하는 데 도움이 되기보 다 오히려 고약하게 방해하기까지 하는 경계의 대상으로 간 주한다는 것이다. 지혜의 화신으로, 그리고 정치인으로 이름 이 드높은 홈볼트wilhelm von Humboldr38가 한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말에 대해 독일 바깥에서는 그 뜻을 아는 사람조 차 드물다. 인간은 막연하고 덧없는 욕망이 아니라 영원하 고 변함없는 이성에 따라 살아야 한다. 그 이성은 우리에게 각자의 능력powcr을 완전하고 전체적으로 일관되게끔 최대 한, 그리고 가장 조화 있게 발전시킬 것을 명령한다." 그러므 로 그는 "각자의 개별성에 맞게 능력을 발전시키기 위해 모 든 사람이 끊임없이 노력을 기울여야 하고, 특히 다른 사람 을 이끌 지도자가 되려는 사람은 그 목적을 향해 언제나 눈 을 부릅뜨고 바라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홈볼트는 이클 위해서 '자유와 상황의 다양성'이라는 두 가지 조건이 필수 적으로 충족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두 가지가 결합하여
'개별적 환력과 고도의 다양성'이 생기는데, 이들이 곧 '독창성의 바탕이 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홈볼트가 한 말을 낯설어한다. 그가 개별 성에 그토록 큰 가치를 부여한 것이 놀랍기까지 한 모양이 다. 그래도 사람들은 개별성이 중요하다는 것은 안다. 문제 는 개별성에 어느 정도 가치를 부여할 것인가이다. 어느 누 구도 자신은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다른 사람을 따라 하기만 하면 좋은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기 때문 이다. 자기가 살아가는 방식에, 그리고 자기가 관심을 기울 이는 일에, 자기 자신의 판단 또는 고유한 특성을 최소한 어 느 정도는 반영해야 한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은 아무 도 없을 것이다. 반면에 사람들이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는 아무런 지식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리고 경험을 통해서는 어떻게 살고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더 나은지에 대 해 하나도 얻을 게 없는 것처럼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 은 어리석은 일이다. 사람들은 경험을 통해 확인된 결과에 대해 알고, 또 그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젊은 시절에 가르침 과 훈련을 받아야 한다. 적당히 나이가 들어 경험을 자신의 방식대로 이용하고 해석하는 것은 인간의 특권이자 인간다 운 삶을 살기 위한 조건이라고 하겠다. 기록으로 남은 다른 사람들의 경험 가운데 어느 부분이 자신의 환경과 성격에 의 미 있게 적용될 수 있을지는 스스로 판단해야 한다. 다른 사 람들의 전통과 관습은, 경험이 어느 정도 그들에게 무언가를 가르쳐주었다는, 또는 가르쳐주었다고 추정할 수 있는 중거 이다. 그러므로 그런 것들을 적절한 수준에서 참고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첫째, 그들의 경험이 너무 지엽적이거나 그들 이 자신의 경험을 잘못 해석했을 수 있다. 둘째, 해석은 옳을 지 몰라도 그 사람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대 체로 관습이라는 것은 관례를 따르는 환경과 성격의 산물이 다. 그러나 그 사람의 환경과 성격이 일반적이지 않을 수 있 다. 셋째, 비록 관습 그 자체가 괜찮은 것이고 그 사람에게도 어울린다 해도, 그저 단순히 관습이니까 따른다는 생각이라 면,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능력은 어느 것도 교육, 발 전시킬 수 없게 된다. 사람의 지각, 판단, 특이한 감정, 정신 활동, 그리고 심지어 도덕적 선호사와 같은 능력들도 오직 선택을 거듭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단련될 수 있다. 그저 관 습이 시키는 대로 따라 하기만 하는 사람은 아무런 선택도 하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다. 무엇이 최선인지 구분하는, 또 는 가장 좋은 것에 욕망을 느끼는 훈련을 하지 못하는 셈이 다. 근육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정신이나 도덕적 힘도 자꾸 써야 커진다. 다른 사람이 믿으니까 자기도 믿는 경우도 그 렇지만, 그저 어떤 일을 다른 사람이 하니까 따라 한다면 자 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떤 문제에 대해 자기 자신의 분명한 이성적 판단에 따라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이성은 튼튼해질 수 없다.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어떤 입장을 취한다면 이성이 오히려 약화되고 만다. (다른 사람의 권리나 감정을 고려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서) 자기 자 신의 감정이나 성격과 다른 방향으로 행동하게 되면, 그것은 감정과 성격을 적극적이고 활기 넘치게 하기보다는 소극적 이고 무기력하게 만드는 큰 요인이 된다.
만일 사람이 세상 또는 주변 환경이 정해주는 대로 살아 간다면, 원숭이의 흉내 내는 능력 이상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자기 자신의 삶을 설계하고 선택하는 사람만이 자기가 타고난 모든 능력을 사용하게 된다. 관찰하기 위해 눈을 써 야 하고, 앞날을 예측하기 위해 이성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
결정을 내리는 데 필요한 자료를 모아야 하며, 결론을 내리 기 위해 이런저런 차이점을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일단 결 정하고 나면, 자신의 신중한 선택을 실천에 옮길 수 있도록 확고한 의지와 자기 통제가 필요하다. 사람이 모두 갖추어야 하고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는 이런 능력은, 각자 행동을 스 스로의 판단과 감정에 따라 결정하는 것과 정확히 비례해서 커진다. 물론 이런 것이 없어도 위험을 피해 좋은 길로 갈 수 있다. 그러나 이 둘 가운데 어느 경우에 인간으로서 더 가치 있는 삶을 살게 될까? 인간이 무엇을 하는지뿐만 아니라, 그 일을 어떤 방식으로 하는지 역시 대단히 중요하다. 인간의 삶을 완전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인간 그 자체이다. 사람의 모양을 한 기계가 사람을 대신해서 집을 짓고, 옥수수를 기르고, 전쟁을 대신해주고, 제 판을 하며, 심지어 교회를 세우기까지 한다고 치자. 그렇더 라도 이 기계와, 현재 좀 더 개명된 세상에서 살고 있다고하 지만 자연이 만들 수 있고 만들어낼 종배 가운데서도 가강 못났다고 할 수 있는 사람과 맞바꾼다는 것은 엄청난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은 본성상 모형대로 찍어내고 그것이 시 키는 대로 따라 하는 기계가 아니다. 그보다는 생명을 붙어 넣어주는 내면의 힘에 따라 온 사방으로 스스로 자라고 발전 하려 하는 나무와 같은 존재이다.
40 사람들이 각자 나름대로 관점을 가지는 것이 바람직하며, 전해 내려오는 관습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거나 때로 그것을 비판적으로 거부하는 것이, 맹목적으로 그리고 단순히 기계 적으로 추종하는 것보다 더 낫다는 사실을 대개는 인정할 것 이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이 각자의 처지에서 정립되어야 한다는 점도 수긍할 것이다. 그러나 욕망이나 충동에도 각자 나름의 특성이 담겨 있 다는 사실, 또는 각 개인의 특성이 반영된 충동을 일정 정도 로 느끼는 것이 위험하거나 크게 나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은 잘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욕망과 충동 역시 신념과 자 제 못지않게 완전한 인간을 만드는 데 필수적인 요소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충동이 강하다고 해서 모두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이 적절하게 균형을 이루지 못할 때, 다시 말해 특정 종류의 목표와 성향은 강하게 발전하는데, 그와 함께 있어야 할 다른 것들은 약하고 활발하지 못할 때 경계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인간의 욕망이 너무 강해서 나 쁜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다. 그것보다는 양심conscience 이 약 한 것이 문제이다. 강한 충동과 약한 양심 사이에는 어떤 근 본적인 인과 관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의 섭리는 오히 려 그 반대이다. 어떤 사람의 욕망과 감정이 다른 사람보다 더 강하고 더 다양하다는 것은, 분명히 말하자면 인간으로서 타고난 자질이 더 풍부하고 따라서 남보다 나쁜 일을 더 많 이 할 수도 있지만, 대체로 그보다는 좋은 일을 할 가능성이 더 큰 셈이라고 말해도 무방하다. 강력한 충동이란 곧 정력 cncrgy의 다른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정력은 나쁜 데 이용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게으르고 무덤덤한 사람보다는 정력 적인 사람이 좋은 일도 더 많이 할 수 있는 법이다. 천성적으 로 감정이 아주 풍부한 사람이 자신의 감정을 아주 강렬하게 가꾸고 발전시킬 수 있는 법이다.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이 충동을 생생하고 강렬하게 만들 수 있으며, 이런 감수성이 있어야 열정적으로 덕을 추구하고 철저하게 자신을 통제할 수 있다. 사회는 이런 일을 유도하여 영웅을 배출할 수 있는 터전을 헐어버리지 않음으로써 - 영웅을 어떻게 만드는지 모르기 때문에 -할 일을 하고 필요한 이익도 보호하는 것이 다. 자기만의 욕망과 충동을 가진 사람, 다시 말해 그것들을 통해 자신의 타고난 본질- 이것은 자신이 속한 사회의 문화 속에서 발전되고 다듬어진다-을 담아내는 사람은, 말하자 면 자신만의 독특한 성격이 있는 사람이다. 반대로 자신만의 욕망과 충동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자기 고유의 성격도 없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마치 다 똑같아서 아무 개성 도 지니지 못한 증기기관이나 다를 바 없다. 누군가 자기고 유의 색을 띤 강렬한 충동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것 을 굳센 의지의 통제 아래 둘 수 있다면, 그는 정력적인 성격 의 소유자이다. 욕망과 충동의 개별성이 발휘되어서는 안 된 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사회가 강한 개성을 지닐 필요가 없 고-사회에 개성 있는 사람이 많으면 좋지 않고 - 일반적으 로 정력이 높은 수준에 이르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아직 초기 발전 단계에 있는 사회에서는 이런 힘들이 사회 가 규율• 통제할 수 있는 한도보다 더 강력할지 모른다. 실제 로 자발성과 개별성이 지나쳐 사회적 규율을 유지하는 데 애 를 먹는 때도 있었다. 그런 경우에는 신체적으로나 정신적 으로 강한 충동을 가진 사람들을 통제하고 규칙에 복종하도 록 가르치는 것이 큰 문제였다. 그래서, 교황이 황제들과 힘 겨루기를 했듯이, 각 개인의 성격을 통제하기 위해 삶의 구 석구석을 통제할 필요가 있다는 명분 아래(사실 사회가 각자 의 성격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는 없었다) 법과 규율이 개인에게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이제는 사회가 개별성 을 훨씬 효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개인의 충동과 선호의 과잉이 아니라 반대로 그런 것의 결핍이 인간 존재 를 위협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제 상황이 많이 바뀌었다. 과 거에는 지위가 높거나 세력이 강한 자들이 힘이 넘친 나머지 법과 제도에 끊임없이 저항했다. 따라서 그들이 법과 제도 아래 꽁꽁 묶여 있어야 그들의 영향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최소한의 안전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사회에서 는 지위가 가장 높은 사람부터 가장 낮은 사람까지 모두 적 대적인 시선과 가공할 만한 검열의 위협 속에 살고 있다. 그 결과, 다른 사람에게 관계되는 일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만 관 계되는 일에서조차, 개인이나 가족을 막론하고, 자신이 무엇 을 더 좋아하는지, 자기 성격과 취향에 맞는 것은 무엇인지. 또는 어떻게 해야 자신이 타고난 최고 • 최선의 재능을 충분 히 발휘하고 최대한 키울 수 있는지 고민하지 않게 되었다.
대신 자신의 위치에 어울리는 것이 무엇인지, 자기와 비슷한 신분의 사람, 또는 경제적 여건이 비슷한 사람이 주로 무엇 을 하는지, (심지어는) 자기보다 높은 위치의 사람이 즐겨 하 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한다. 이는 그들이 자기 기질에 어 울리는 것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관습적으로 하는 것을 더 선 호한다는 말이 아니다. 관습적인 것을 빼고 나면 그들에게는 따로 자기 고유의 기질이라는 것이 아예 없다. 정신 자체가 굴레에 묶여 있는 것이다. 재미 삼아 하는 일도, 다른 사람이 무엇을 하는지 먼저 살피고서 따라 하고, 군중 속에 묻혀 들 어가기를 좋아한다. 선택도 그저 사람들이 흔히 하는 것 중 에서 고르는 데 국한된다. 독특한 취미나 유별난 행동은 범 죄처럼 기피 대상이 된다. 자기 자신의 타고난 성질을 따르 지 않다 보니 마침내 따라야 할 각자 고유의 성질까지 없어 지게 된다. 그들이 지닌 인간 능력들은 시들고 죽어버린다.
그 어떤 강력한 소망이나 자연적 쾌락도 느끼지 못한다. 한 마디로 자기만의 생각이나 고유한 감정 또는 그 무엇이든, 자기만의 것이 없어진다. 자, 이를 인간에게 바람직한 상황 으로 봐야 할까? 아니면 나쁜 상황이라고 해야 좋을까?
칼뱅은 이런 상태가 바람직하다고 주장한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자기 뜻대로 사는 것:CEwil은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죄악 가운데서도 아주 무거운 것이다. 그에 반해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좋은 일은 복종과 관련이 있다. 따라서 인간에 게 선택이라는 것은 없다. 주어진 것을 반드시 해야 한다. 다 른 길은 없다. "의무가 아닌 것은 모두 죄악이다." 인간은 너 무 타락했기 때문에, 자기 속에 있는 인간성을 완전히 죽일 때까지 어느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다. 인간에 대한 이런 이 론을 믿는 사람이 보기에는, 인간이 지닌 특성, 능력, 그리고 감수성 등을 모두 없애버리는 것은 죄가 아니다. 그저 자신 을 신의 의지에 완전히 맡겨버리는 것 외에 따로 아무런 능력도 가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신의 의지를 잘 따 르는 것 외에 다른 용도로 자신의 능력을 쓸 바에야, 차라리 그 능력 자체가 없는 편이 더 좋다는 것이다. 칼뱅주의는 이 런 주장을 편다. 그리고 스스로를 칼뱅주의자로 부르지 않는 사람들 중에서도 상당수가 비록 정도는 약하지만 비슷한 입 장을 취한다. 이들은 신의 의지라는 것에 대해 덜 금욕적인 해석을 한다. 인간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해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최고 권력자, 즉 신의 지시를 순종한다는 조건 아래 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것 가운데 일부를 추구해도 신의 의 지에 부합할 수 있다는 뜻이다.
오늘날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인간에 대한 이런 폐쇄적 인 이론과, 이것이 표방하는 꽉 막혀 답답하기 이를 데 없는 유형의 인간 성격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강하게 끈다. 이 들은, 자연 그대로의 나무보다는 가지를 바짝 치거나 이런저 런 동물 모양으로 잘린 모습이 훨씬 보기 좋듯이, 인간이 비 비 꼬이고 위축된 존재로 전락한 것은 조물주가 그렇게 만 들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종교든 인간이 어떤 선 한 존재good Bing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이 런 선한 존재는 자신이 인간에게 준 모든 능력이 뿌리를 드 러낸 채 말라비틀어지기보다는 잘 자라고 번성하기를 바랄 것이다. 그가 기대한 대로 피조물들이 차츰 발전해나갈 때마 다, 즉 이해하고 행동하고 즐거움을 느끼는 그들의 능력이 한 단계씩 향상될 때마다 기쁨을 느끼리라고 믿는 것이 논리 에도 맞다. 칼뱅주의와는 다른 각도에서 성공적인 인간상을 그릴 수도 있다. 그저 인간적인 욕심을 모두 끊어버리는 것 만이 능사는 아니다. 그리스도교적 자기 부정clidenal 뿐만 아니라 '이교도들의 자기 주장 sdlFaseton 도 나름대로 가치 가 있다. 그리스인들은 자기 발전 sdf-deveopmenr이라는 이 상을 지향했는데, 자기 지배sdf government라는 플라톤과 그 리스도교의 이상은 이런 그리스적 이상과 융합된 것이지 그 것을 대체하는 것은 아니다. 알키비아데스Alcibiads42보다는 존 녹스가 되는 것이 더 낫고, 이들 두 사람보다는 페리클레 스Prids 3가 되는 것이 더 낫다. 오늘날 페리클레스 같은 사 람은 굳이 존 녹스가 지닌 장점이 없어도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인간은 개인에 따라 서로 다른 것들을 획일적으로 묶어두 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권리와 이익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전 제 아래 잘 가꾸고 발전시킴으로써 더욱 고귀하고 아름다운 존재가 될 수 있다. 창작물이 그것을 만든 사람의 성격을 반 영하듯이, 인류의 일원이라는 사실에 한껏 자부심을 느낄 정 도로 인간이 발전하게 되면, 우리 삶도 풍요로워지고 다양해 지며 환력이 넘칠 것이다. 고귀한 생각과 고결한 감정을 더 옥 복돈위주게 되고, 모든 사람을 하나로 묶는 연대의 끈이 더욱 강해질 것이다. 각자의 개별성이 발전하는 것과 비례해서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 더욱 가치 있는 존재가 되며, 또 그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도 더욱 가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 다. 자기 존재에 대해 더욱 충만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이 다. 각 개인이 이처럼 의미 있는 삶을 영위하면, 개인들이 모 인 사회 역시 더욱 의미 있는 존재가 될 것이다. 인간의 본 성 가운데 어떤 강력한 것이 다른 요소들의 발전을 저해하면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적절하게 억압할 수밖에 없다. 그러 나 이런 억압은 충분히 의미 있는 결과를 낳는다. 인간 발전 이라는 측면에서 보더라도 그렇다. 다른 사람에게 해를 주지 않기 위해 자신의 기질을 억제하면 자기 발전의 수단을 잃게 된다. 그러나 그런 수단은 주로 다른 사람이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희생시킴으로써 얻는 것이다. 따라서 이기적인 요소 를 억제하면 자기 내면의 사회적 요소social parr를 더욱 발전 시키게 되고, 결과적으로 그에 못지않은 것을 새로 얻게 된 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엄격한 정의의 규칙을 따르다 보 면 타인의 이익을 목표로 삼는 감정과 능력을 발전시킬 수 있다. 그러나 타인의 이익에 영향을 주지 않는 일인데 단순 히 그들의 불쾌한 마음 때문에 제지를 받는다면, 그런 제지 에 대한 거부감만 자랄 뿐, 무언가 가치 있는 것은 발달하지 못한다. 자꾸 묵종 하는 버릇이 들면 성격 자체가 단조롭 고 둔감해진다. 사람들이 자기 성향대로 마음껏 살기 위해서 는 각자 다른 삶을 사는 것이 허용되어야 한다. 어느 시대든 이런 의미의 자유가 허용되는 것과 비례해서 후대에 그이름 을 남길 수 있었다. 아무리 악명 높은 폭정이라 해도 각자의 개별성이 발휘될 여지가 남아 있는 한 아직 최악의 상태는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이에 반해 개별성을 짓밟는 체제는 그 이름이 무엇이든, 그리고 그것이 신의 뜻을 따른다거나 인간 이 만든 율법을 집행한다거나 하는 등 어떤 명분을 내세우 든, 최악의 독재 체제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개별성이 발전development과 같은 것이고, 오직 개별성을 잘 키워야만 인간이 높은 수준의 발전에 이르게 되 거나 또는 이를 수 있다고 강조했으니, 이제 이쯤에서 내가 주장하는 바를 정리할까 한다. 우리 삶에서 각자를 인간이 이를 수 있는 최선의 상태에 최대한 가깝게 끌어올리는 것 이상으로 더 중요하거나 더 좋은 것이 무엇이겠는가? 반대 로 이를 가로막는 것 이상으로 더 나쁜 일이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분명히 말하지만, 이런 주장도 이 문제에 대해 그 누 구보다 더 깊이 깨달을 필요가 있는 사람을 설득하지는 못한 다. 그래서 자유를 열망하지 않고 자유의 향기에 자신을 맡 기려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발전된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무엇인가 유익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과, 다 른 사람들이 자유를 향유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음으로써 자 신들도 지적인 측면에서 뭔가 이득을 얻게 되리라는 사실을 더욱 자세히 보여줄 필요가 있다.
첫째, 나는 그들이 이런 사람들에게서 무엇인가 배울 것이 있으리라는 점을 상기시키고 싶다. 어느 누구도 독창성이 우 리 삶에서 대단히 중요한 요소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우리 삶에서 새로운 진리를 발견하고 한때 진리였던 것이 이제 더 이상 진리가 되지 못하는 때를 간파하는 사람만 소중한 것은 아니다. 남이 하지 않는 관례를 처음 만들고, 더욱 발전된 행 동과 더 수준 높은 취향과 감각을 선보이는 사람도 필요하 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모든 측면에서 이미 완벽한 상태 에 이르렀다고 믿는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도 이 사실을 부인 하지 못할 것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아무나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 중에서도 극히 일부만이 새로 운 실험을 주도할 뿐이다. 사람들이 그 새 길을 따라간다면 사회 전체가 한 단계 더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 이들 소수야 말로 세상의 소금과 같은 존재이다. 이들이 없으면 우리 삶 은 정체(m를 면치 못할 것이다. 이들은 전에 없던 새로운 좋은 것을 만들어낼 뿐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좋은 것을 잘 유지• 발전시키기도 한다. 새로 해야 할 것이 없으면 인간의 지성도 더 이상 필요가 없을까? 옛것을 따르는 사람들이 왜 그것을 해야 하는지 잊어버리고, 그런 일을 인간이 아니라 짐승처럼 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까? 최고의 이론과 관 레라는 것들도 너무 쉽게 도식적인 것으로 전락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끊임없이 샘솟는 독창성으로 기존의 이론과 관례가 그렇고 그런 구습으로 굳어버리는 것을 방지해주는 사 람들이 없다면, 그런 죽어버린 전통은 새롭게 부각되는 것들 이 가하는 최소한의 충격에도 버티지 못한다. 비잔틴 제국이 보여주듯이 문명 자체가 죽어버릴 수도 있다. 천재는 언제나 소수일 수밖에 없다. 이는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언제 나 변함없을 진리이다.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살 수 있는 토양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천재는 오직 자유의 공 기 속에서만 자유롭게 숨을 쉴 수 있다. 천재는 그 속성상 다 른 사람들보다 더 개인적이기 때문에, 각 개인이 자기 기분 대로 살아가지 못하도록 사회가 쳐놓은 작은 그물 속으로 들 어가는 것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어려워한다. 그들이 제재를 두려워한 나머지, 그 작은 틀 속으로 억지로 들어가 사는 데 동의한다면, 그래서 그런 억압 속에서 자신의 재능을 사장한 다면, 사회는 천재들에게서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만 일 천재적 재능을 가진 사람들 가운데 누군가가 강한 성격에 힘입어 자신들을 둘러싼 족쇄들을 깨뜨려버릴 수 있다면, 이 들이야말로 자신들을 평범함 속에 가두어버리려고 시도하 는 사회-마치 나이아가라처럼 큰 강이 더치 운하"처럼 좁 은 곳으로 잘 흘러가지 못한다고 불평하듯이, 그들의 행동에 대해 미쳤다, '엉뚱하다'고 하면서 압박을 가하는 사회 를 위한 푯대가 될 것이다.
이론상으로는 천재의 중요성과 그들이 자유롭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는 것을 아무도 부인하 지 않지만, 실재로는 거의 모든 사람이 이 문제에 무관심하 다. 나는 이런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이에 대해 힘주어 강조하고자 한다. 사람들은 감동적인 시를 쓰고 멋있는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천재를 아주 좋게 생각한다. 생각과 행동의 독 창성을 칭찬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거의 모든 사람 들이, 실제로 그 마음속 깊은 곳을 들여다보면 독창성이 없 어도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불행하게도 이를 당연하게 생각한다. 사실 독창적이지 못한 사람들로서는 독창성이 왜 중요한지 이해하기 어렵다. 독창성이 자기들에게 무슨 의미 가 있는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들이 어떻게 알 수 있겠는 가? 그들이 그것을 안다면 독창성이 문제 되지도 않을 것이 다. 독창성이 그들을 위해 하는 일 가운데 첫 번째로 중요한 것은 그들의 눈을 뜨게 해주는 것이다. 이렇게만 된다면 그 들도 독창성을 얻을 가능성이 있다. 누군가가 처음 시작하지 않았으면 이 세상의 그 무엇도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 우리 주변에 보이는 좋은 것들은 모두 독창성이 뛰어난 사 람들의 작품이다. 따라서 이 시점에서는 이런 사실을 상기하 면서, 독창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모르는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에는 여전히 독창적인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 많음을 최 대한 겸손히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아가 독창성 이 부족한 사람일수록 자신에게 그것이 모자란다는 사실을 잘 인식하도록 해주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엄연한 진실을 하나 이야기해야겠다. 정신적인 능력이 뛰 어나거나 뛰어나다고 여겨지는 사람에게, 우리는 어느 정도 든 겉으로나마 또는 실제로 경의를 표한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는 일반적으로 평범한 사람들이 최고 권력 을 장악하는 경향이 있다. 고대와 중세에서는, 그리고 점차 그 정도가 약해지기는 하지만 봉건 시대부터 현재에 이르는 긴 과도기 동안, 능력 있는 개인은 자신의 힘으로 권력을 잡 았다. 그래서 뛰어난 재능이 있든가 권문세가 출신이라면 그 자신이 상당한 권력자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개인이 군중 속에 묻혀버린다. 정치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이 제 여론public opinion이 세상을 지배한다는 말은 거의 진부하 기까지 하다. 대중mases 만이 권력자라는 말에 어울리는 유 일한 존재가 되었다. 정부도 대중이 원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을 챙겨주는 기관이 되고 있다. 공공 영역에서만 그런 것 이 아니고 개인들의 도덕적·사회적 관계에서도 똑같은 현 상이 목격된다. 공중 public의 생각을 한데 묶어서 여론이라 고들 하지만 그 공중이 언제나 똑같은 것은 아니다. 그 말은 미국에서는 백인 전체를 가리키지만 영국에서는 주로 중산 층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들은 언제나 대중, 다시 말해 평범 한 보통 사람들의 집합체로 존재한다. 더 중요하고 놀라운 사실은, 대중이 이제는 더 이상 교회나 국가의 유명 인사, 저명한 지도자들을 따라 하거나, 또는 책에 나오는 내용에 따 라 자신들의 생각을 정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들의 생각 은 그들과 아주 비슷한 사람들이, 그들을 향해 또 때로는 그 들의 이름을 내걸고서 신문을 통해 밝히는 생각과 다르지 않 다. 내가 이런 일들을 불만스러워한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일반적으로 말해서, 현재 인간 정신이 놓여 있는 낮은 상태 에 비추어볼 때 더 나은 것이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는 다. 문제는 평범한 사람들이 움직이는 정부가 평범한 정부가 되는 것을 피할 길이 없다는 데 있다. 민주적인 정부 또는 다 수의 귀족들이 지배하는 정부의 정치적 행동이나, 그 정부 가 떠받드는 사람들의 여론, 자질, 그리고 생각의 방향이 보 통 수준을 넘었던 경우는 한 번도 없었고 또 그럴 수도 없다.
그래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많은 사람들이 자청해서 여러 자 문단의 도움을 받았다. 훌륭한 재능과 학식을 갖춘 '한 사람' 또는 몇 사람'의 영향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그 덕분에 전성 기를 구가할 수 있었다. 현명한 일 또는 고상한 일들이 처음 에는 모두 개인들에게서 시작되며 또 그래야만 한다. 일반적 으로 보면 첫 단추는 어떤 특별한 한 사람이 꿴다. 보통 사람 에게는 그런 첫걸음을 따라가는 것이 존경과 영광을 받는 길 이다. 현명하고 고상한 일에 내면적으로 반응하고 눈을 똑바 로 뜬 채 거기에 이끌릴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여기서 탁월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 힘으로 권력을 장악해서 이 세상을 자기 마음대로 주무르는 일종의 '영웅 숭배론'을 펼치자는 것 은 아니다. 단지 천재 같은 사람이 자기 방식대로 세상을 살 아갈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할 뿐이다. 그 러나 천재가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 방식을 따라 살도록 강요 한다면 그들의 자유와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천재 자신에게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그저 그런 정도의 능력밖에 갖지 못한 다수 보통 사람들의 주장이 점점 압도적 인 힘으로 온 세상을 지배하는 요즘 같은 때에는, 널리 통용 되는 의견의 잘못을 지적하고 시정할 수 있도록 뛰어난 사 상을 지닌 사람들의 개별성이 더욱 발휘되어야 한다. 소수 의 뛰어난 사람이 대중의 생각과 다른 방향으로 자유롭고 거 리낌 없이 행동하고 살아가도록 장려되어야만 한다. 여느 시 대 같으면, 그들이 대중과 다르게 행동하는 것 자체는 별 의 미가 없고 오로지 더 나은 행동을 할 때만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에서는 획일성을 거부하는 파격, 그리고 관습을 따르지 않는 것만으로도 인류에게 크게 봉사하는 셈이 된다. 오늘날에는 무언가 남과 다른 것을 일 절 용납하지 않을 정도로 여론의 전제 베가 심하다. 바로 이 런 이유 때문에 색다르게 행동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래야 그러한 전제를 부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강한 성 격이 충만할 때 거기에서 남다른 개성이 꽃핀다. 그리고 한 사회 속에서 남다른 개성이 자유롭게 만개할 수 있는 가능성은, 일반적으로 그 사회가 보여주는 탁월한 재능과 정신적 활력, 그리고 도덕적 용기와 비례한다. 불행하게도 오늘날에 는 극히 일부 용기 있는 사람들만이 그런 개성을 발휘할 뿐 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시대가 직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나는 지금까지 관습과 어긋나는 일을 최대한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되면 언젠가는 그런 행동도 새로운 관습으로 정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러나 내가 남의 간섭을 받지 않고 관습을 뛰어넘는 행동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고는 있지만, 그렇게 해야만 좀 더 나은 행동 양식, 그리고 사람들이 널리 따라야 할 만큼 가 치 있는 관습을 창조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중요성이 탁월한 정신적 능력을 갖춘 소수의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것도 결코 아니다.
모든 인간의 삶이 어떤 특정인 또는 소수 사람들의 생각에 맞춰져 정형화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누구든지 웬만한 정도 의 상식과 경험만 있다면, 자신의 삶을 자기 방식대로 살아 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그 방식 자체가 최선이기 때문 이 아니다. 그보다는 자기 방식대로his own mode 사는 길이기 때문에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5 인간은 양 같은 동물과는 다르다. 그리고 양이라고 해서 다 똑같지도 않다. 우리는 코트 나 구두를 고를 때, 자기 몸의 치수를 재서 맞추거나 아니면
온 가게를 다 뒤져 자기에게 맞는 것 하나를 선택한다. 사람 이 살아가는 것이 코트 고르기보다 더 쉬운가? 사람들의 육 체나 정신 상태가 각자의 발 모양보다 더 비슷할까? 만일 사 람들의 취향이 서로 다르다면, 그 이유만으로도 사람들을 하 나의 틀에 맞춰 획일화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사람은 취향 만이 아니라 각자 추구하는 정신적 발전도 다르기 때문에 그 에 맞는 조건 또한 필요하다. 온갖 종류의 식물들이 다 똑같 은 물리적 환경과 대기, 그리고 기후 조건 속에서 살 수 없듯 이, 인간 또한 똑같은 도덕적 기준 아래에서는 건강한 삶을 누릴 수 없다. 같은 것이라 해도, 이 사람의 정신적 성장에는 도움이 되지만 저 사람에게는 방해물이 되기도 한다. 동일 한 생활양식이라도, 어떤 사람에게는 행동 능력을 잘 키워주 면서 최선의 상태에서 건강하고 즐겁게 살 수 있도록 해주지 만, 다른 사람에게는 모든 내적 삶을 황폐하게 만들어버리는 지긋지긋한 암초 같은 것이 되기도 한다.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는 일들, 고통을 느끼게 되는 상황, 이런 문제들을 지각 하는 육체적• 정신적 작용은 사람에 따라 아주 다양하다. 그 러므로 각자의 경우에 맞는 다양한 삶의 형태가 허용되지 않 는다면, 인간은 충분히 행복해질 수 없다. 제각기 타고난 소 질에 맞게 정신적 도덕적 • 미적 능력을 발전시킬 수도 없게 된다. 그런데도 왜 다수 대중이 용인하는 취향과 생활양식만 관용의 대상이 되는가? 수도원 같은 일부 예외를 제외하고는 취향의 다양성을 완전히 부인하는 곳은 없다. 사람에 따 라서는 아무 부담 없이, 노 젓는 배를 타는 것이나 담배 피우 는 것, 또는 음악이나 운동, 장기, 카드놀이, 아니면 공부하는 것을 좋아할 수도 있고 싫어할 수도 있다. 이런 것을 좋아하 는 사람이나 싫어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말릴 수 없기 때 문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 특히 여자가 아무도 하지 않는 것 을 한다'든가 또는 '남이 다 하는 것을 안 한다'면, 마치 그 사 람이 아주 심각한 도덕적 잘못을 저지르기나 한 것처럼 비난 의 대상이 된다. 사람들이 자신의 평판에 손상을 입지 않으 면서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어느 정도 사치스럽게 멋을 부리 며 하자면 상당한 지위 또는 그에 상응하는 다른 힘이 있거 나, 그도 아니면 그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인정을 받아 야 한다. 왜냐하면 누구든 그 일을 지나치게 하면 불명예스 러운 비난 이상의 것을 자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잘못하면 정신병자 취급을 받아 친척들이 재산을 몰수해서 나눠 가지 는 사태가 생길 수도 있다.46
대중 여론은 조금이라도 개별성을 발휘하는 것을 용납하 려 하지 않는데, 현재 그것이 흘러가는 방향에는 한 가지 특 성이 있다. 보통 사람들은 지적인 면뿐만 아니라 취향도 덤 덤한 편이다. 그들은 취미나 하고 싶어 하는 일에 대한 욕구 가 그리 강렬하지 않기 때문에, 관례를 벗어난 것은 기피하 려 든다. 다른 사람이 관습과 어긋나게 행동하는 것을 이해하지도 못한다. 그런 모든 행동을 야비하고 무절제한 것으로 치부하면서, 경멸하기까지 한다. 이런 일반적 경향에 덧붙 여, 이른바 도덕을 향상시킨다면서 새로운 움직임이 일어나 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상황은 불을 보듯 뻔하다. 오늘날 사 람의 행동을 규칙화하며, 일상적인 기준을 넘는다 싶은 것은 막으려 드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외국에서도 박애주의자 philanthropiss 라는 사람들은 이웃을 도덕적이고 사려 깊은 사 람으로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다. 이런 시대적 경향 때문에 사람들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보편적인 행동 규칙을 따른 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기준을 따르도록 압력을 가한다. 그 기준이란 무엇인가? 명시적 또 는 암묵적으로 어느 것도 강력하게 열망하지 않는 것이 바로 그 기준이다. 아무런 뚜렷한 성격이 없는 것을 이상으로 삼 는다. 남보다 특출하게 두드러지고, 보통 사람이 볼 때 눈에 띄게 이탈하는 듯한 개성은 사정없이 짓눌러버린다. 마치 중 국 여인들의 전족해온 처럼 불구가 되게 만드는 것이다.
흔히 이상적이라고 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의 절반을 배제 해버리듯, 오늘날 사람들이 수용하는 기준을 따르다 보면 나 머지 절반을 불충분하게 모방하는 결과만 낳고 만다. 건강한 이성에 의해 인도받는 왕성한 정력, 양심적인 의지에 따라 엄격하게 통제되는 강렬한 감정, 이런 것이 현시대에는 용납 되지 않는다. 미약한 감정과 허약한 정력이 그 자리를 대신채운다. 강력한 의지나 이성이 없다 보니 무비판적으로 남 을 따라 사는 것이 주류가 되고 있다. 제법 강한 개성을 지닌 사람도 차츰 전통적인 것을 생각 없이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영국에서는 이제 장사하는 것을 빼면 넘치는 정력을 쓸 데를 찾기 어렵다. 이런 쪽에 사용되는 정력은 여전히 상당할 것 이다. 그렇게 쓰고 남은 얼마 안 되는 정력은 유익하고 심 지어 자선 사업에 가까운 취미 활동에 쓸 수 있다. 그러나 그 종류는 언제나 한두 가지에 한정되고 그나마 규모도 크지 않다. 영국을 돋보이게 만드는 것은 모두 집단적인 것들뿐이 며 개인적인 특성이 빛을 보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영국 사 람이 잘하는 것은 그저 집단으로 모여 활동하는 것뿐인 듯 보일 정도이다. 이런 현상에 대해 우리 나라의 도덕적 • 종교 적 박애주의자들은 대단히 만족하고 있다. 그러나 영국의 오 늘이 있게 만든 것은 이런 사람들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시 각을 가진 사람들이다. 이들의 존재가 사라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
관습의 전제표가 곳곳에서 인간의 발전을 가로막는 심 각한 장애물로 등장하면서, 관습보다 더 나은 것을 지향하는 기질- 상황에 따라 자유, 진보, 개선의 정신 등 달리 일컫어 진다-을 끊임없이 박해하고 있다. 개선의 정신과 자유의 정신이 언제나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개선을 원 치 않는 사람에게 개선을 강제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유의 정신이 그런 강제를 용납하지 않으며, 개선을 가 로막는 적들과 국지적으로, 그리고 한시적으로 연합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개선을 가능하게 만드는 절대적이며 영원한 요 소는 오직 자유에서 나온다. 자유가 허용되는 곳에서만 사람 의 수만큼이나 다양한 독립적인 개선의 요소가 뿌리를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발전 원리progresive principle는 자유를 사 랑하든, 아니면 개선을 사랑하든, 그 형태에 관계없이, 관습 의 횡포에 대해서는 적대적이다. 관습의 굴레로부터의 해방 을 포함하지 않으면 발전 원리라고 할 수 없다. 그래서 이 둘 의 싸움이 인간 역사를 규정하는 기본 변수가 된다. 정확하 게 말하자면, 이 세계의 대다수 지역에는 역사가 없다. 왜냐 하면 그곳에서는 관습의 전횡이 극에 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시아 전체가 바로 이런 상황이다. 그곳에서는 관습이 모 든 문제에 대한 최종 결정권을 쥐고 있다. 그래서 관습을 따 르는 것이 곧 정의요, 올바른 것으로 통한다. 권력에 도취된 일부 폭군이 아니라면 감히 누구도 관습에 대들 생각을 못한 다. 그 결과가 무엇인지 우리는 잘 안다. 그 나라들도 한때는 분명히 독창성을 구가했을 것이다. 인구도 많았고 학문도 높 았으며 각종 예술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럴 때는 이 세계에 서 가장 위대하고 강력한 국가의 대열에 들었다. 그러나 지 금은 어떤가? 그들은 숲속을 헤매고 다니던 조상들과는 달 리 휘황찬란한 궁궐과 멋들어진 사원을 만들어냈지만, 문제는 그들의 관습이 자유와 발전을 가로막았다는 데 있다. 역 사를 돌이켜보면, 한 민족이 어느 정도는 번영을 누리다가 그만 쇠퇴기에 접어들고 만다. 언제 그런 일이 생기는가? 바 로 개별성을 가볍게 여기는 때이다. 비슷한 일이 유럽 국가 에서 벌어진다 해도 그 결과가 똑같지는 않을 것이다. 이 나 라들을 위협하는 관습의 전제가 그들처럼 심한 정체를 야기 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색다른 것을 제지하기는 하겠 지만, 모든 변화를 거부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선조들 이 물려준 고루한 관습을 폐기해왔다. 아직도 모든 사람이 다른 사람과 똑같은 옷을 입어야 하지만, 그 모양은 1년에 한 번 또는 두 번씩 바뀐다. 그러므로 우리는 변화가 있을 때, 그 것이 아름다움이나 편리함의 관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변화를 위한 변화가 될 것임을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아 름다움이나 편리함에 관한 생각이 모든 나라 사람들에게 똑 같은 시기에 생겼다가 때가 되면 한꺼번에 바뀌는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변화를 추구하는 동시에 발 전도 도모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새로운 기계를 만들어내고 또 다른 새것이 그것을 대체할 때까지 사용한다. 우리는 정 치와 교육, 나아가 도덕을 개선하기 위해 진지하게 노력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도덕적 개선은,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들도 우리 처럼 선한 생활을 추구하도록 설득하거나 강제하는 데 바탕을 둔 다). 우리가 발전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역사상 그 누구보다도 더 발전적인 사람들이라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우리가 등을 돌리고 거부하고 있는 것은 바로 가 별성이다. 사람들은 서로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자신의 불 완전함과 다른 사람의 탁월함, 또는 양자의 장점을 함께 묶 음으로써 따로 있을 때보다 더 좋은 것을 만들 수 있는 가능 성에 관심을 보이게 된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망각 한 채 우리 자신을 모두 똑같은 존재로 만든 상태에서 오늘 과 같은 발전을 이룩했다면, 그것은 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중국에서 그런 무서운 실례를 보게 된다. 중국은 초 기 한때 놀라운 재능,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지혜를 자랑하 기까지 했다. 정말 드물게 운이 좋아 아주 훌륭한 관습이 있 었기 때문이다. 어떤 측면에서는 가장 개명된 유럽인까지 도-일부 조건을 달기는 했지만 현자와 철학자라고 부르 지 않을 수 없었던 사람들이 그런 관습을 만들었다. 그들은 또한 자기 나라 사람들이 최고 수준의 지혜를 습득할 수 있 도록, 지혜가 가장 뛰어난 사람들이 명예와 권력을 함께 누 릴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고안해냈다는 점에서도 주목의 대 상이 된다.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민족이라면 인간 발전의 비 밀을 알아냈음이 틀림없고, 따라서 중단 없이 세계 역사를 이끌어 나갔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그들은 수천 년 동안이 나 제자리에 머물러 있다. 이제 그들이 조금이라도 더 앞으 로 나갈 수 있다면, 그것은 외국인들의 도움 덕분일 것이다.
그들은 오늘날 영국의 박애주의자들이 그토록 간절하게 추 구하고 있는 것- 사람들을 모두 똑같이 만들고 사람들의 생 각과 행동을 동일한 격률과 규칙 아래 통제하는 것 -이상을 해냈다. 그 결과가 지금과 같은 것이다. 오늘날 대중 여론이 라는 것은 중국의 교육과 정치가 하던 일을 똑같이 따라 하 고 있다. 단지 비조직적으로 그런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유 럽도 이런 굴레를 벗어나 개별성을 활짝 꽃피우지 못하면, 아무리 과거 문명이 찬란하고 그리스도교의 영향이 뛰어나 다 해도 제2의 중국이 될 수밖에 없다.
유럽이 지금까지 이런 운명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고 버 틸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인가? 무엇이 유럽 민족들로 하 여금 정체되지 않고 계속해서 진보할 수 있게 만들었는가?
어떤 사람은 유럽 민족들의 우수성을 이야기한다. 설렁 그 렇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과일 뿐 결코 원인이 아니다. 유럽 을 유럽답게 만든 요인. 그것은 바로 성격과 문화의 놀라운 다양성이다. 개인이나 계급, 그리고 민족이 극단적으로 서로 다르다. 이들 각자가 엄청나게 다양한 길을 찾아 헤매면서 무언가 가치 있는 것들을 만들어냈다. 각 시대마다 다른 길 을 걸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관용이 부족했다. 다들 모든 사 람이 자기와 같은 식으로 일하도록 만들면 기가 막히게 좋은 결과를 얻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자기 방 식을 강요하려는 시도가 항구적인 성공을 거두는 경우는 드
물었다. 시간이 되면 다른 사람들이 개척한 좋은 길을 받아 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내가 볼 때, 전진하는 경로를여 럿 가지고 있었고 다면적인 발전을 추구했다는 집, 전적으로 이 덕분에 유럽의 오늘이 있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유럽 이 벌써부터 이 소중한 자산을 멀리하고 있다. 사람들을 똑 같이 만들려는 중국식 이상을 향해 무섭게 나아가고 있다.
토크빌Aleis de Tocqueville은 그가 마지막으로 쓴 중요한 저술 에서 오늘날의 프랑스 사람들이 불과 한 세대 이전보다 서로 얼마나 닮아가고 있는지 분석했다.47 영국 사람들은 그 정도 가 훨씬 더 심하다고 할 수 있다. 이미 앞에서 소개한 바와 같 이, 홈볼트는 인간 발전을 위한 필수 조건으로 두 가지, 즉자 유와 상황의 다양성을 들었는데, 이는 결국 사람들이 서로 똑같지 않아야 한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그 가운데서도 두 번째 조건인 다양성이 영국에서 하루가 다르게 줄어들고 있다. 서로 다른 계급과 개인을 둘러싸고서 그들의 성격을 형성하던 환경이 하루가 다르게 닮아가고 있다. 과거에는 서 로 다른 계급과 이웃, 서로 다른 직업과 활동 분야의 사람들 이, 말하자면 서로 다른 세계 속에서 살았다. 그러나 이제는 상당한 정도로 같은 세계에서 살고들 있다. 과거와 비교해볼 때 읽고 듣고 보는 것이 같아졌다. 놀러 가는 곳도 같다. 희망 이나 두려워하는 것도 서로 닮아간다. 똑같은 권리와 자유를 누리며 그것을 향유하는 방법도 같다. 물론 신분의 차이는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서로 닮아가는 경향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미미하다. 사람들을 똑같게 만드는 것 은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우선 이 시대의 정치적 변화가 그 것을 부추긴다. 신분이 낮은 사람들은 끌어올리고 높은 사람 들은 끌어내리기 때문이다. 교육의 기회가 확대되는 것 역시 동일한 현상을 촉진한다. 왜냐하면 교육이 사람들을 비슷한 영향권 아래에 들게 하고, 나아가 비슷한 사실과 감정을 접 하기 더 쉽게 만들기 때문이다. 교통과 통신 수단의 발전 또 한 심각한 영향을 끼친다. 이제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 들끼리 개인적인 접촉이 용이해졌고,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거주지를 옮기는 속도도 훨씬 빨라지고 있다. 상업과 제조업 의 발달은, 편리한 환경이 주는 이점을 더욱 널리 퍼뜨리고 모든 사람들이 심지어 최고 수준의 목표에 대해서도 똑같은 야망을 품을 수 있게 만들었다. 이제는 출세라는 것이 특정 계급의 전유물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열림으로써 역시 비슷 한 결과를 촉진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예를 든 모든 것 들보다도 더욱더 결정적으로 사람들 사이의 유사성을 촉진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영국을 포함한 다른 자유 국가 에서 여론이 국가를 움직이는 중요한 변수로서 절대적으로 확실히 떠오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과거에는 특별한 사회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그 특별함 때문에 다수 대중의 생각을 무시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러한 것들이 점차 사라지고 모두가 평등한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대중도 나름대로 의지 를 가져야 한다는 적극적인 생각이 확산되면서 정치 일선에 있는 사람들의 머릿속에서는 대중의 의지에 맞선다는 생각 이 점점 더 사라지고 있다. 그 결과 통님을 뛰어넘으려는 시 도에 대해서는 그 어떤 사회적 후원도 보이지 않는다. 다시 말해, 대중이 수로 밀어붙이는 것에 대항하면서 대중과 다른 자신만의 생각이나 경향을 지키려는 강력한 사회 세력이 아 예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이런 모든 이유들이 서로 합쳐져서 개별성에 대해 몹시 적 대적인 환경이 만들어지고 있다. 따라서 개별성을 어떻게 보 존할 수 있을지 막막하기만 하다. 그래도 대중보다 앞서 있 는 지식인들이 개별성의 중요성, 즉사람들이 서로 다른 것 이 비록 상황을 더 낫게 만들지는 못하더라도-더 낫게 만 들기는커녕 일부 사람들의 눈에는 오히려 더 악화시키는 것 처럼 보일지라도 -그래도 다들 똑같은 것보다는 낫다는 사 실을 깨닫지 못하는 한, 사정은 그리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달리 보면, 사람들을 아직 완벽하게 하나로 묶지 못 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개별성의 중요성을 환기시킬 수 있 는 최적의 시기이다. 초기가 지나면 병을 확실히 고치기 어 려운 법이다. 다른 모든 사람들도 우리처럼 살아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이 바로 그 병을 키우는 뿌리이다. 우리 삶이 획 일적인 하나의 형태로 거의 굳어진 뒤에야 그것을 뒤집으려하면 그때는 불경구이니 비도덕적이니, 심지어 자연에 반 하는 괴물과도 같다는 등 온갖 비난과 공격을 감수해야 한 다. 사람들은 잠시만 다양성과 벽을 쌓고 살아도 순식간에 그 중요성을 잊어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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