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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탄 본문
나는 송탄 사람인데, 행정상 평택으로 합쳐진 이제는 이름이 없는 옛날 동네다. 넷플릭스 인간 수업에 나온 학교에서 중고등학교를 나온 토박이다. 20살 이후로 학교 때문에 서울로 올라왔고 군대와 외국을 제외하고는 지금까지 쭉 서울에서 살고 있다.
이번에 브랜드를 기획하면서 막상 '나는 누구인가'를 먼저 해결하자 였는데 이게 아주 어려운 것이다. 대학교 1학년 과제로 받은 적이야 있었지만 그저 과제였지 내 제품을 낸다는 생각을 하면서 맞이한 질문은 아니었지. 덕분에 나의 과거는 어땠는지에 대해 객관적인 시선으로 볼 시간이 필요했고, 인간관계와 부모와의 관계 , 성장기의 시대적 분위기, 성장했던 공간과 지역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그 사람의 행동과 머리는 무조건 과거에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시대적으로 80년 말과 90년대가 교차하는, 그러니까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변화에 있던, 세기말을 겪어본, 전화기에서 메신저를 기억하는 (당시엔 친구 집에 전화하는 예절부터 배우는 게 당연했다.) 처음으로 대한민국이 보수당에서 진보당으로 넘어간 시대. 2002 월드컵엔 학생이었고 밤새 거리를 활보하던. IMF도 겪었고 집안도 망해 본. 뭐 이런저런 변화의 시대를 겪은 나잇 대다.
아래는 내가 자라온 동네를 살짝 설명해야겠다.
지역적으로 보면 살아온 송탄이라는 곳은 시골과 도시의 중간이랄까, 아니 물과 기름처럼 다리 하나만 건너도 도시와 논밭의 경계가 뚜렷한 동네다. 에이포지와 같은 흰색은 찾아볼 수 없고 동네가 약간은 노란 끼가 낀 듯. 미색이 도는 도시이자 시골. 낡고 한적한 동네다. 공단이 많은 동네라 부모님들은 공장을 다니는 집안이 많았고 매연이 항상 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 썩 좋은 환경의 동네는 아니어서 도를 넘는 비행청소년들이 많았다. 평택에는 쌈리 라고 불리우는 유명한 촌도 있었고, 내가 기억하는 우리 학교 (남중 남고 나옴)는 중학생 때 가방에 사시미칼을 넣고 다니는 소위 '생활'한다는 양아치나 건달 형들이 즐비했다. 화장실만 갔다 하면 담배를 태우다가 소변보고 있는 나 같은 어린 친구들에게 센척하다가 돈 좀 꿔달라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매일 쉬는 시간마다 어떤 반에나 싸움이 났으며 다들 몰려가 응원을 하고 결국 의자를 던져서 창문을 깨거나 한 명이 피떡이 되어야 소동은 멈추는 것이었다. 싸움이 없으면 싸움을 부추기는 악랄한 동네였다. 생각해보면 대학교를 가서 듣는 첫 말은 언제나 어디서 왔니 로 시작해 '평택 애들은 기가 쎄'였다. 아마 인천과 평택을 하나로 싸잡아 질 낮은 학생들이 다니는 동네로 찍혀있던 기억이 난다.
나야 순하게 다녔지만 막상 틀린 말도 아니다. 아직 주변 또래에 성인 오락실 운영, 누나들 나오는 빠, 중고차를 팔거나 레커를 모는 애들도 있으니까. 최근엔 평택에 삼성이 들어와 저런 상업들이 성행하면서 돈을 얼마를 번다는 둥 자랑질을 해대기에 돈을 버는 법은 따로 있구나~ 란 생각에 빠진 적도 있다.
군대에서 선임들이 어디 사람이냐, 평택 사람입니다. 거기 역앞에 쌈리 유명한데 가봤냐! 안가봤습니다. 이후 노잼 캐릭터라며 괴롭힘 당하기 일쑤였다. 일상이 무료한 선임들은 유명 촌락들 쯤은 섭렵한 후임들과 근무만 나갔다하면 시간이 잘 간다는 것이다. 나는 대학생때 기타나 치고 미적지근 썸탄 이야기나 하니 재미가 있을리 없었다.
아무튼 아래부터는 내 마음의 모교 송탄 미군부대 앞에서 예전에 찍은 사진들이다.
외국인 반 한국인 반의 묘한 동네인데, 이게 젊은 한국인이 아니라 늙은 동네라 노인들과 젊은 외국인이 많은 분위기다. 미군부대 앞에는 2-30대 미군들이 즐비하게 놀고 그 앞은 나이 든 한국인들이 노점이나 인형가게, 이불집, 호프집을 운영하며 연명한다. 2000년 중순쯤에는 프랜차이즈가 쭉 들어왔다가 다 밀려나가고 최근엔 외국인들이 세계 각국의 음식 가게를 직접 내서 이태원보다 더 오리지널의 냄새가 나는 동네로 굳어졌다. 실제로 이태원에서 놀고 영국 유학을 다녀온 해피는 송탄을 거닐며 '여기가 원조다'라는 명언을 남겼으나 어디에 남긴지는 모르겠다.
아래부터는 미군부대 안에 풍경. 미대로 전과 및 편입준비하면서 학원비가 필요해 미군부대 주방에서 일년간 일을 했었다. 다시 생각해도 학원비가 아깝다. 그냥 말도 안되는 작업이나 잔뜩 만들어서 낼 걸. 아래는 부대안 chillis 풍경이다. 참 많은 사진들이 있었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다 사라졌다.
의정부와 함께 부대찌개가 유명한 동네. 버거 파는 가게가 한 길에 다섯 개가 있는 신기한 동네. 특히 송탄에서 신장동이라는 동네에서 크고 자랐는데, 뭐 이후에는 깔끔한 동네로 이사 갔지만 이상하게 가끔 고향에 내려가면 꼭 들려서 한 바퀴 휘 돌게 되는 마음의 고향이다.
덕분에 나는 외국 냄새와 낡은 노점과 같은 토종의 분위기를 좋아하게 된 것이 아닌가. 이게 무지 안 어울릴 거 같은데 잘 어울린다. 그거슨 마치 부대찌개랑 치즈 같은 것. 굴다리 아래있던 육교포차 인가 이름도 기억이 안나는 그곳에서 마감친 직원들끼리 밤새 술마시던 기억. 다들 젊은이들이었다. 나를 좋아하던 한 여인은 양색시가 되어 골반에 날개 그림 타투를 했다는 소문만 서글프게 들린다.
아래는 송탄의 갬성 사진
여기 아래부터는 최근에 무지개다리를 건넌 워리와 내가 어릴 적부터 살던 집이다. 큰아버지가 주식하시다가 집을 날리고 아빠가 경매로 나온 집을 구매, 그냥 큰집 식구들이 평생 살고 있다.
중간에 욕심부리다가 매도 타이밍을 잘못 잡으신 아버지와 이를 종용하신 큰아버지 덕분에 우리 집만 빼고 망해가던 주변은 임대주택들이 높게 올라섰다. 이후 집 가격은 떡락. 덕분에 우리 집은 그늘 속에 있지만, 나는 이런 낡은걸 좋아한다. 아버지는 이제는 좀 헤어나고 싶어 하신다. 주택 구매 이자의 구렁텅이에서..
저거 2억 주고 살 타이밍인 2007년에 서울에 13평 아파트를 구매했어야했다. 나랑 형이 여태까지 월세를 내지도 않았을 뿐더러 시세차액이 얼마였을지... 우리 세대는 이런 실수를 하지 말아야지 생각하지만, 이젠 사실 살 수도 없는 경계를 건너버렸다.
나중에 이 집을 내가 받고 리모델링해서 뭔가 하던가 사는 게 꿈이었는데 죽은 동네 송탄에는 올 사람이 없기 때문에 포기했다. 안과 밖에 마당도 있고 모양이 딱 직사각형인 백 평짜리 집이다. 나도 연남이나 문래, 성수나 상수처럼 집을 개조해서 뭔가 하면 대박 나겠다! 는 생각이 있었는데 결국 유동인구 면에서 서울과 송탄은 비할바가 못되기에 포기하고 직장인의 삶을 영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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