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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화법 본문
오늘은 알람 없이 아침에 일어났는데 웬 새소리도 들리고 평소보다 밝고 아이들 뛰노는 소리가 들렸다. 아찔한 느낌에 시간을 봤는데 그냥 내가 일찍 일어난 거였다. 샤워하고 아침 먹고 커피를 갈까 말까 고민하면서 멍하게 시간 좀 죽치다 출근길을 나섰다. 현관문을 여니 겨울 냄새가 스쳤다. 자라는 건 손톱과 머리카락뿐이요 짧아지는 건 낮과 내 햄스트링이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지났나 살짝 서글퍼진다. 곧 내년이다. 스트레칭 열심히 합시다.
출근길에 인스타나 휙휙 넘기면서 이런 것도 팔리나, 많은 게 있네 생각하며 새로운 브랜드와 제품 설명들을 들여다본다. 기가 찬다. 원래 있는 제품 카피해놓고 해설들이 분분하다. 달의 표면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둥, 인간의 실존과 내면에 대한 고찰에서 나왔다는 등등. 인간의 팔자, 8, 무한대와 같은 어쩌고.. 이거 어디서 많이 본 느낌이다. 부끄러움은 읽는 사람의 몫이다.
대학을 졸업하기 전 나와 친구는 재미있는걸 하나 해보기로했다. 그땐 UX/ UI로 갈 길을 정했었는데 웹/ 앱이야 시간으로 만드는 거지만 콘텐츠는 그야말로 아이디어 싸움이었다. 미술품 경매 혹은 판매가 지금이야 흔한데 당시는 어디 스튜디오에 등록되고 전시를 하는 작가들이나 할 수 있는 모양새였다. 좋아. 우리는 대학생들의 작품을 팔자. 작가와 소비자를 바로 연결하는 플랫폼을 만들자고 정하고 학생들의 작품을 구하러 다녔다.
나는 미대를 가려던 공대생이었고, 관심이 많았기에 매 해 졸업 작품들과 미술 전시를 뻔질나게 다니고 있었다. 암만 자질구레한 자취방이라도 큼직한 캔버스라도 하나 걸어두고 조명하나 때리면 뭐라도 된 기분을 느끼던 차에 우리가 계획한 프로젝트가 재미있겠다 생각했다.
여러 전시들을 돌아다니며 느낀건, 자신만의 스타일로 시간을 채운 작업들은 느낌이 분명 달랐다. 그러나 기천만원을 대학 학비로 쏟은 미대생들의 졸업작품을 보면, 중고등학교 사생대회에서 그릴법한 것들을 걸어놓고 온갖 미사여구와 난해한 말들로 후려치려는 작업들도 상당수였다. (아닌것도 많다 보통 대학원 가더라) 캡션을 읽고 작품 설명을 보고 갸우뚱해진다. 정말 그런 생각으로 그리고 만들었을까. 내가 볼 땐 적당히 그리다가 점점 말도 붙혀나간거 같은데. 평소 해오던 방식대로 뭔가 만들고 글은 채워야 하니 일명 '예술 화법'으로 억지로 양념을 친 것이 더 안타까워 보일 뿐이었다. 내가 난독증인가 싶어 같이 간 친구에게 물어보니 그냥 이 판에 만연한 예술병 말투라 일축한다. 짧은 내 생각인데 앤디 워홀이나 바스키야도 기법과 명성 그 자체지 위에 작업한 사람들처럼 작품을 억지로 설명하지 않지 않았나 싶다.
딱히 독서도 안 하고, 예술가라고 말하고 싶으나 누군가에게 자신의 생각을 친절하게 이해시키고 설명하는 글을 써 본 적이 없던 사람들. 텍스트를 읽고 삼키기 보다 상대적으로 쉬운 영화들을 틀어놓고 입 털던 학생들. 취업 때가 되어 합격 자소서들을 들여다보며 빈칸에 자신의 키워드들을 맞춰 넣었을 테지. 그때부터 자신이 열심히 쌓아온 세계를 관객 혹은 소비자에게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라, 되어있던걸 잘 버무려서 있어 보이게 만들겠다는 습관이 들었을 거다. 결국 같이 플랫폼을 만들기로 한 친구는 같이 몇몇 졸업전시를 다니고는 저런 건 자기라도 안 사겠다며 이내 관뒀다. 나도 점점 예술품에 붙은 글을 믿지 않으면서 그리고 작가 인터뷰 따위 보다는 작업물 자체가 내뿜는 것에 집중하게 됐다.
이제야 멋진 공간에서 혹은 온라인에서 능력 있는 큐레이터들이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작품들을 잘 전시해주시니 즐기고 있지만, 오래간만에 당시 느낌을 다시 마주했다. 말을 꾸며대던 친구들이 미대는 나왔고, 그나마 유사한 브랜딩 부서로 흘러 들어갔는지. 전공과 성향이 매치되는게 아니라는건 나도 알지만, 나는 자연계를 나오다 보니 정확한 인풋과 아웃풋, 원인과 결과, 정확한 의도와 걸맞은 작업에 집착한다는 문제가 있다. 여튼 인이 박힌 사고 중 하나, 엔지니어에게는 명확한 과정이나 결과물보다 부연 설명이 많으면 '사기'라고 배웠다. 예술은 덜 만든 것도 의도라 하면 그만이니 장르가 좀 다르긴 하다.
요사스러운 글을 써서 사고 싶게 만드는 게 아닌, 제품과 말에서 나오는 직관적인 매력이 중요하다 생각하는 편인데 사실 나도 내 취향이 있다 뿐이지, 크게 뭘 알아 볼 안목도 없다. 그저 확실한 것은 희소하고 가치 있으면 김환기 선생님의 작품처럼 시간이 지나 자연스럽게 훌륭한 가격이 책정된다는 것. 먼저 정신적인 것들에 집중하고 끝까지 마감에 신경 쓰고 인내하며 각자의 결로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한다. 그러나 내가 김환기 선생님의 숨겨진 작품이 아파트 가구 버리는데 옛날 액자 째로 버려져있으면 알아보겠느냐 이거다. 나도 말 뿐이다.
* 결 부연설명_ 나무·돌·살가죽 따위의 조직이 굳고 무른 부분이 모여 일정하게 켜를 지으면서 짜인 바탕의 상태나 무늬, 혹은 의식이 미치지 않는 시간의 흐름이나 동안임을 나타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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