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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7월 신과장 일기

beos 2020. 7. 1. 18:42

언제나 전에 있던 선임의 모습을 닮지 않으려 노력했으나, 턱과 배에는 기름이 끼고 그가 했던 행동들이 나에게서 보이기 시작했다.

나도 전과 같은 형형한 눈빛이 사라진지 오래, 경기와 코로나 탓을하며 예년 보다 일찍 찾아 올 비수기를 두려워한다. 매일 아침 자동으로 날라오는 정부 정책이 가득한 메세지를 받고 링크 된 뉴스 기사를 긁적인다. 상관도 없는 이야기들 왜이리 떠드나 싶다가도 한 두 칼럼 심각하게 읽으면 시간이 훅 지나가있다. 선물 받은 드립커피 한 잔 내리고, 일도 조금 하고 읽었던 칼럼을 토대로 앞날을 나 나름대로 상상하다보면 어느덧 점심시간이다. 업무 시간에 뉴스 기사에 댓글이나 달면서 언제나 목이 날아갈까 두려워하던 선임의 흐리멍텅했던 눈빛이 떠오른다. 나라고 썩 다르지도 않은 것 같다. 글이나 쓰고 있으니.

일은 적당히 한다. 전에는 에너지를 쥐어 짜 일했지만, 지금은 적당히해도 중간 이상으로 퍼포먼스가 나오는 '짬밥'이 생겼다. 근데 내가 '일을 왜 저렇게하지' 라고 생각했던 선임도 본인이 잘 하고있다고 생각했겠지 란 생각을 하면 나도 그런가 싶다. 하루 종일 짧게 메일 답변 구글 번역기로 보내고 '아~ 바쁘다' 라고 외치며 하품하던 사람 정도는 아니겠지 라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안한다.

 

 

10월 예정 샘플링 중인 제품

 

 

내 디자인이 세상에 나오지 않도록 팀장에게 블락당하던 시절이 있었다.

(후임의 디자인이 잘 팔리면 본인이 쪽팔려서 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그에겐 어색한 디자인이었으리라)

3년 전 지금은 뻔한 크라운 판토, 3mm 두께의 홈선 활용 그리고 10mm가 넘는 길이의 엔드피스를 그려갔으나 이게 안경이냐며 모욕을 당하고 묵살당했다. 딱 그 디자인이 일년 뒤에 다른 회사에서 초대박 히트를 냈고, 영업사원들이 '왜 우린 그런 디자인을 안하느냐, 돈받고 뭐하냐' 며 원성이 자자했고 그는 내가 내 자리에 붙혀둔 도면을 가리키며 ‘우리’가 먼저 했었다! 며 면피했다. 그와 단 둘이 있을 때 '내가 왜 제가 한걸 출시하지 않았나요' 라고 물어보자 그 땐 틀렸고 지금은 맞다는 명언을 날렸다.

이후 나는 직원이 생기면 마음껏 몇 모델 정도는 제품으로 출시 시키자 다짐했다. 그러나 이제와서 드는 생각이지만, 회사 입장에서 '재고'를 본다면 절대 쉬운일은 아니다.

그래도 그랬던 때를 기억, 작년에 새로 들어 온 사원이 그려온 안구를 발주했다. 잘 팔리는 모양은 아니었으나 매력적이었다. 거기에 마법처럼 팔릴 수 밖에 없는 부속들을 달았다. 출시되고 완판. 그러나 시간이 지나 큰 재고가 남은 이후. 결국 오래 팔리는건 내가 그렸던 뻔한 쉐잎들이었다.

나는 내가 원하는 도면이나 치도록 그를 'tool'로 전락시켰다. 그 경험 이후, 그가 그려 온 프론트 도면들은 수정을 해도 자꾸 수정 할 것들만 생겼다. 내 마음에 안든다는 것인데, 내 마음은 무엇인가. 결국 나도 내 눈에 익숙한 물건을 ‘좋다’고 인지한다. 익숙한 것들만 옳다고 하던 예전 선임처럼 되어가는 나를 본다. 한편으로는 팔리는 모양이 무엇인지 감을 잡았다. 이건 어느 정도 얕은 수준에만 올라와도 알 수 있는 영역이기 때문에 그런 안경들은 세상에 빠르게 널려버린다. 결국 내가 만든 제품은 뻔한 물건이 된다. 그러나 잘 팔린다. 아이러니 하다. 그리고 그 팔리는 모양에 대한 ‘감’으로 자연스레 그림이 그려진다. 그 틀을 다시 깨기는 어렵기 때문에 때론 내가 원치 않는 모양의 안경도 보고 만들고 구매해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아마 나의 직원도 신선한 디자인을 제안했으나 기성의 제품에게 길들여진 나에게 거절 당하게 되었겠지. 덜 팔릴거라고, 그리고 시도해봤는 실제로 그랬으므로. 기가 죽고 눈빛이 죽을 수 밖에 없다. 결국 '해봤는데 안돼~' 라고 말하던 그들과 같은 데이터가 쌓여 그들처럼 말하게 된다. 열정을 갖고 들어왔으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직원에게 보상으로 나는 적당히 일을 만들어 그의 시간을 적당히 채워주고 적지만 안전하고 고정적인 월급을 받을 수 있는 자리를 유지시켜준다. 남들보다 조금 높은 자리에서 회사가 만들어 준 시스템인데 내 시스템이라 착각한다.


 

이유가 있는 부속의 모양들

 

회사는 예상하던 상황과는 달라져 신모델 보다는 들고있는 물건들을 팔아야하는 시기가 됐다. 신제품을 만들어야 하는 디자이너들은 일을 잃었다. 농부도 전쟁나면 군인이 되어야한다 생각하는 편이라, 때에 맞는 일들에 알아서들 뛰어들어 다른 영역의 일을 만든다. 직원이 하는 일은 온라인에 관련된 일이라 내가 잘 모는 일인데, 결국 나도 모르는 일을 하라고 시켜서 결과를 가져오라던 전임자와 같은 짓을 하고있지는 않은지.

나도 어느덧 그와 같은 '뻔한 기성 세대'가 되고있다.

지금 나는 볕도 잘 들어오고 물도 적당한, 안전하고 작은 우물 안에서 두꺼비를 몰아내고 가장 따끈한 돌멩이 위에 앉아있는 개구리라 비유해도 좋겠다. 그리고 다른 더 큰 우물로 나가기 위해 힘을 써서 뛰쳐 나간다 한들 다른 우물에 익숙해지면, 또 지금과 같아질거라고 위안하며 지금 자리에 만족한다. 그러나 항상 안경의 끝판으로 가고싶다. 그 곳에서 옳은 제품이란 무엇인가를 더 큰 판에서 시험하고픈 욕심이다.

참 별로였던 전임자와 같은 모습들이 보일수록 우울해지지만, 한편 희망도있다. 내가 관련 된 일에는 끝까지 책임을 지는 것, 공을 함께 한 팀에게 돌리는 것, 척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려고 노력한다. 그에겐 전혀 없던 것들이다.

긴 비수기가 오고있다. 2020년에 출시 될 제품들 전부 공장에서 제작중이고 출시 시기만 맞추면 되는 상황이라 당분간 급할 일은 없다. 코로나 때문에 올 해 9월에 런칭 예정이었던 새 브랜드도 늦춰졌다. 여유롭게 내년에 출시 될 제품들의 컨셉을 정하고 열심히 도면을 쌓아 갈 시기다. 회사가 잘 클 시스템과 자리를 만들어주고 다음 세대의 안경 디자이너에게 자리를 넘기고 더 큰 판으로 가야한다.

 

2020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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