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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회사 퇴사와 재입사 (2) 본문
퇴사를 하고 일본으로 날아간 이유는 후쿠이현에 있는 일본 안경 공장에 꼭 가보고 싶었던 것과 조만간 도쿄에서 있을 ioft2018에 가서 일본 프레임들의 진수를 맛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짧게 ioft가 뭐냐면, 도쿄에서 이뤄지는 안경 전시라 할 수 있다. 상식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2대 안경 페어는 파리 silmo, 이태리 MIDO 가 있고, 곁다리로 홍콩 HKTDC OPTIC FAIR, LA vision expo, 베이징 (이름 모름), 한국 대구 DIOPS, 도쿄 IOFT, 이스탄불 silmo 등등 있는데 아마 더 있겠지? 아무튼 그러하다. 한국의 하우스 브랜드들이 모여서 호텔에서 진행하는 수주회나 단독으로 진행하는 브랜드들의 수주회들이 뻔해서 지루하던 차에 앞으로 나의 휴가마다 외국에 있는 안경 쇼에 맞춰서 가보기로 다짐했던 터이다. 현재 다니는 회사는 휴가가 1년에 2박 3일 수준이므로 그런데 가기는 어려웠는데, 전에는 추석이 껴있어서 남은 휴가와 섞고 나머지는 어느정도 딜을 치고 파리를 둘러보는데 보름 정도 감사히 다녀올 수 있었다.
사실 일본에 날아간건 10월 중순 약간 이전이었고 10월 초에는 무슨 일이 있었냐면 문래 안경 공방이 이사를 해서 이사를 도와줬다. 굉장히 무거운 장비들도 많고 짱박아 놓은 게 너무 많아서... 로코 안경 공방 이사 도운 게 안경원 정리할 때랑 이층으로 옮길 때니까 당시 벌써 두세 번째인데, 할 때마다 극한을 겼었다. 공방 오너인 희준 형이 일단 끝을 모르는 사내이기 때문에 일을 할 때 강하게 밀어 붙이는 스타일이다. 아내인 정미 누나에겐 한없이 스위트 한 대조적인 면을 보여준다. 이사도 사실 작업실 천장 무너질 거 같다고 건물주가 쫓아낸 상황이라, 일 도와주고 국밥 한 그릇 얻어먹기 미안한 그런 그림이었다. (이후 그 공간은 상승한 땅값에 비례해 돈 많은 세입자를 집어넣는다. 우리 쫒아 내려던 거지 건물 보수는 구라였던 것 같다.) 비행기는 이미 예매했으니 바쁜 공방을 미안하지만 뒤로하고 나와 명신이는 도쿄로 간다.
일본으로 건너가기 전 마지막으로 사장님께서 날 부르셔서 빅 딜을 거셨다.연봉의 드라마틱한 상승과 팀장을 내보내겠다는. 원래는 사장님도 직원들과 공장 사장님들과 많은 대화를 해 본 것 같았다. 저 팀장의 근무태도나 기여도 대해 의문을 갖고 언제 쫒아낼지 각만 재고있던 모양이었다. 아마 원래는 나를 팀장으로 둘 생각은 아니었고 다른 경력자를 두려고 하셨던 것 같은데, 이 회사의 조건이 빡빡하기도 하고 은근 실력있는 안경 디자인 관련 관리직에 있던 사람들이 오기엔 무덤이라고 느꼈으리라. 나는 당시 압구정에 있던 안경브랜드 MD자리가 확정이 났었고 일본에 갔다가 10월에 입사하자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거기는 명신이가 다니고 있던 회사였고, 중순에는 그와 일본 안경 쇼에 가기로 약속이 되어있었다. 젊은 브랜드에서 커리어를 다시 칠 할 것인가, 팀장으로 그 낡은 회사를 새로 리빌드 해야 하나.. 답은 재입사였는데 연봉 차이가 확연했고, 그 회사의 MD는 상대적으로 디자이너의 뒤치닥거리를 할 자리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다니던 회사는 시간과 휴가에 관한 이슈 및 팀장만 없으면 괜찮은 회사였다. 어차피 일하는게 재밌어서 당시 휴식에 대한 건 별 신경이 안쓰였다. 여하튼 지금 회사에는 오케이 하고, 저 쪽 회사에는 죄송하다 했다. 거기서도 몇 달 간격으로 몇 번 더 연락이 오다가 더 이상 오지는 않았다. 그곳은 이후 임금 체불로 고생을 한다.
명신이는 내가 2015년 안경 공방에서 일을 시작할 때쯤 수제안경을 만들어보고 싶다고 찾아온 대학생이었다. 당시 나는 안경 공방에서 기술을 배워서 내 브랜드를 내자는 꿈을 갖고 있었는데, 하면 할수록 이런 방식으론 어렵겠다는 생각을 했다. 작업실을 다니면서 생활은 유지해야 하니, 수학 과외도 하고 몸 쓰는 투잡 쓰리잡을 병행했는데 즐겁고 즐거운 안경 디자인과 손으로 안경을 만드는 일만으로는 생활을 하기는 어려웠다. 일단 수제 안경까지 흘러오는 사람은 이른 마 안경 마니아 인 데다가 까다로웠다. 빈티지 프레임을 사기는 비싸고 세월의 풍파를 겪은 빈티지 프레임의 내구성을 믿지 못해 복각을 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에 맞는 컬러를 구비하기 위해 쓰지도 않을 아세테이틀을 벌크로 주문해야 했고, 부속들도 다들 입맛이 다른데 여러 가지를 쟁여두다 보니 작업 진행이 시원하지 못했고, 매 껀마다 방식이 달라졌기 때문에 나 스스로 제품 신뢰도가 떨어진다 생각했던 것 같다. 밀려드는 손님과 주문제작 때문에 나만의 디자인을 만들어서 팔아야겠단 생각을 할 틈이 없었다. 그 쯤 명신이도 우리와 같은 길을 가고 싶다고 공방에서 일한다길래 열심히 말렸다. 공방은 돈 내고 네 거 만들고, 일은 회사에서 하렴. 투자자 만나서 브랜드 내는 게 맞는 거 같다고..

좋다는데 어쩌겠는가. 명신이도 로코 안경 공방에 팀원으로 들어왔다. 인원도 늘었고, 너무 손님만 받는 형식이 되어 안 되겠다 싶어 주에 하루는 손님을 안 받고 다들 전투적으로 자신들의 프레임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그렇게 만든 우리들의 프레임을 명신이와 플리마켓에 나가 팔아치웠다. 당시 가수 윤종신 안경을 기획하고 컬러별로 네 개 정도 만들었는데 명신이랑 정미 누나가 홍대 프리마켓에서 다 팔아서 쾌재를 불렀던 기억이 난다. 이후 업그레이드 세 개 더 만들었는데, 하림 께서 문래에 공연하러 왔다길래 그 안경을 헌정해드렸다. 2020년인 지금도 가끔 보면 종종 쓰고 나오셔서 흐뭇한 기분이다. 전보다 지금은 여러 안경 돌려쓰시는 것 같은데, 안경이야 기분이나 분위기 내고 싶을 때 바꿔 쓰는 게 맞다. 내가 만든 게 최고는 아니다.

명신이를 설명하다가 길이 이상해졌는데, 다시 2018년으로 돌아오면 그는 공방을 다니다가 안경 회사에 입사했다. 당시에 1위가 젠틀몬스터라면 아주 먼 상대의 2등은 그 곳이었다. 다시 생각해도 브랜딩이나 네이밍이 좋았다. 프레임도 그들만의 개성이 있었고 직원들도 굉장히 젊은 연령대로 구성되어 어떤 젊은이들만의 작당이 가능할 것 같았다. 그는 이 회사에 다니면서 안경의 본 고장인 일본으로 갈 꿈을 갖고 있었기에 일본어를 일 년간 갈고닦아 괜찮은 일본어 점수와 실력을 얻는다. 그리고 정확히 일년 뒤 퇴사 후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무작정 일본으로 날아간 비범한 친구다. 그는 입사 전, 이미 한국인 최초로 일본 effector라는 안경회사에서 면접을 봤었고, 경력 부족, 일본어 부족 두 가지 이유로 내년에 다시 보자는 약속을 받아냈기에 밀도 있게 일 년을 채웠다. 그 중간인 10월 내가 퇴사한 시점에 명신이는 effector에 눈 도장도 찍고 안경 페어에서 분위기도 탐사하기 위해 나와 같이 도쿄로 갔다. 푸른 재규어를 끌고다니는 effector 대표와 자잘한 수다도 떨고 다음에 또 보자는 이야기. 안경 팔아서 저정도 부유하려면 사업을 어떻게 해야하는가 상상도 해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간 ioft 안경 페어를 둘러보고 느낀 점은 '아 별거 없네'였다.

최근 한국의 DIOPS도 막상 유명 브랜드들은 출전을 안 한다. 지역에서 부스를 내줘 저렴하게 참가할 수 있는 완전 무명업체나 진흥원과 좋은 관계에 있는 몇몇 업체들, 혹은 홍보를 위한 브랜드, 원래 있는 바이어들을 공식적으로 만나야 하는 업체나, 공장들이 출전하는 정도지 안타깝게도 예전과는 다르게 별 볼일 없는 게 현실인데 일본도 그럴 줄은 몰랐다. 물론 가끔씩 신박한 브랜드나 공장들이 출전해서 두세 개씩은 볼만한 게 있다. 전에 파리에 갔을 때 출전한 아이반이나 디타같은 죽이는 브랜드들은 ioft에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타르트 옵티컬 정도 나왔는데, 난 빈티지 복각 브랜드엔 그다지 흥미가 없다. 뭐 실망도 했지만 선술집에서 맥주 마시며 담배 피우던 기억은 좋은 추억으로 남는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나도 할만하겠다는 건방진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11월 1일 한국으로 돌아와 싹 정리된 회사 팀장의 자리에 앉았다. 얄밉게도 전임 팀장은 과거 파일들을 전부 지워놓고 나간 상태였다. (컴퓨터에 비번도 걸려있었다) 다행히 내가 퇴사하기 전에 내가 했던 작업들은 모조리 다 백업시켜 뒀기에 큰 문제는 없었다. 한달 간 그는 공장과 한 일도 없이 퇴사했기 때문에 일을 파악할 것도 없었다. 애잔하게도 인터넷 히스토리에 남아있는 처절한 구직활동과 여자 연예인 사진, 오타 가득한 그의 이력서만이 컴퓨터에 남아있던 전부였다.
나는 11월 초 바로 공장 사장님과 함께 중국 선전으로 날아가기 위해 티켓을 예매했다. 다음 해 도수테를 기획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도면을 잘 치는 새로운 직원도 들어왔다. 그리고 오개월 정도 뒤 팀장에게서 직접 연락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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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회사 퇴사와 재입사 (마지막)
2018년 이 지나고 겨울과 봄 사이에 신모델도 들어가고, 국내 외 공장들과 돌아왔다며 정리도 했으며 슬슬 재고나 판매에 대한 수량들이 완벽하게 넘어와서 자리가 굳어지던 판이었다. 반년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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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회사 퇴사와 재입사 (1)
퇴사 전후 상황을 정리하기 전에 배경을 설명해야 한다. 나는 2017년 초에 사원으로 입사. 안경 디자인에 관한 일들과 업계가 굴러가는 상황을 알아가는 것이 재미있었다. 같은 층 사무실에 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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