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os
안경회사 퇴사와 재입사 (1) 본문
퇴사 전후 상황을 정리하기 전에 배경을 설명해야 한다.
나는 2015 수제안경 작업실에서 디자인과 메이킹 시작, 유통과 시장을 알기 위해 2017년 초에 디자이너로 입사했다. 아세테이트 프레임만 다루다가 다양한 소재의 안경 디자인에 관련한 일들, 안경 업계가 굴러가는 상황을 알아가는 것이 재미있었다. 같은 층 사무실에 디자인 팀장과, 회계와 수출, 매출을 관리하는 과장이 있었는데 그는 팀장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이듬해 5월쯤 퇴사했다. 그리고 나는 그의 일을 어느 정도 떠맡게 된다. 디자인 팀장은 업계에서의 경력과 판매수량을 인정받아 내가 오기 전 부장으로 입사했다 한다. 20년 전 국내에서 가장 큰 안경원 체인 기획실에서 선글라스 디자인으로 커리어를 시작했다. 90년대 말이나 2000년 초반이었을 텐데 당시는 유명인이 쓰고 나오는 선글라스들이 폭발적으로 팔리는. 무엇을 가져놔도 팔리는 극 호황기였다. 린다 김 선글라스나 신창원 티셔츠도 방송에만 노출되면 전국 품절이 되는 미친 시기였다.
일반인들은 모르겠지만, 유명 브랜드 샤넬, 구찌, 톰포드, 루이뷔통 등등 브랜드 라이선스 비용을 한국 회사에서 지불하고 선글라스 제조는 한국이나 중국, 잘해봐야 이태리에서 제조한다. 뭐 보통 중국에서 만들고 이태리제라고 마킹만 새로 하겠지만 요즘은 그렇게 하다간 감방 간다. 실제로 본사에서 디자이너들이 만드는 모델도 있지만, 한국에서만 파는 아닌 것도 있다는 이야기다. 그렇다고 짭은 아닌데.. 아무튼 유명 브랜드를 만드는 같은 공장에서 나오는 제품의 퀄리티는 동일한데 브랜드 마킹에 따라 값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덕분에 나는 선물을 제외하고는 딱히 브랜드 이름에 따라 제품을 구매하지 않는다. 아무튼 외국 영화가 유행하면 거기에 나오는 유명인의 선글라스를 해외에서 구매, 그대로 카피해서 백화점에만 들어가면 대박을 치던 시기였다. 그의 젊은 시절은 그러했다. 이후 유명 여성 브랜드 라이선스를 구매한 사장을 만나 호황기를 즐긴다. 당시는 중국으로 넘어가 대량으로 주문을 하는 것은 큰 회사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으므로 그는 공장에게 많은 환대를 받고 갑으로써의 즐거움을 누렸던 것 같다. 장사가 잘 되던 그의 젊은 시절 출장만 가면 룸쌀롱 대접받던 시절을 자랑했기 때문에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당시 넓은 한 층을 단 둘만 쓰던 텅 빈 사무실에서, 그는 일개 사원이었던 나에게 일을 시키고 옛날이야기를 떠들며 접대받던 추억에 곧 잘 빠지곤 했다. 안경 업계는 원래 박봉이라며 나의 30살 당시 월 최저시급에 가까운 월급을 받던 나의 급여를 합리화시키면서, 자신의 연봉은 20년 전과 같다며 지긋지긋하게 투덜거리던 그. 나중에 연말정산 때 종이가 잘못 들어와 들여보았더니 대략 내 3~3.5배는 되는 연봉을 받고 있었다. 이렇게 무능한 사람이 이 돈을 받고 있구나, 이 양반이 20년 전 내 나이 때 저 돈을 벌었구나 란 생각과 함께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낀 건 그때였던 것 같다.
이후 나는 본업은 본업, 꿈은 꿈이고 이 월급으로는 평생 결혼도 못하고 굶어 죽겠다는 생각에 안경 공방을 통해 들어온 디자인 외주를 받기 시작했다. 투잡이었다. 지금은 온라인으로 홍보도 많이 하는 브랜드인데, 당시 짧은 기간에 도수테 20 모델 선글라스 10 모델 정도를 그려서 브리핑하고 셀렉, 생산되어 지금까지 스테디셀러로 팔리고 있다.
당시 그 브랜드는 신생업체였기 때문에 판매 채널이 다양했고, 더 생기 있는 생각들을 실천하는 젊은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투자가 아닌 본인 돈을 들고 시작하는 사장과 인생의 고비를 한 번씩은 맛 본 안경판 슬램덩크 주인공들을 모아두었다고 해야 하나. 다들 갈증이 있었고, 상당한 회의와 일정들을 소화했다. 타 회사에 근무 중인 나를 배려들은 해주셨지만, 매 평일 퇴근하고 타 사무실에서 디자인하는 동안 굉장히 지쳤는데 실력은 많이 늘었던 것 같다. 두 개의 브랜드에서 디자인을 해야 하니 두 가지 자아를 만들어 컨셉을 잡았던 것 같은데, 시간이 지난 지금 보면 크게 다르지는 않다. 아마 보편적으로 잘 팔리는 물건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반년 정도 지나니 눈빛에는 안경 디자인에 대한 살기가 돌았다. 무엇인가 미친 듯 전념하면 느끼는.. 어떤 벽을 깨고 한번 지나간 듯 한, 몇 층 정도 나도 모르게 올라간 느낌이었다. 이상하게 그때쯤 그린 디자인들이 팀장선에서 자꾸 잘렸는데, 열 받아서 공장에 직접 넣었던 내 도면이 한달 뒤 샘플로 되어 올라왔다. 회사 구조상 샘플은 팀장이 먼저 받아보게 되어있는데, 공장이 알아서 보낸거라 생각하던 팀장은 그 샘플 디자인을 본인이 한 거라며 사장 앞에서 큰 소리를 쳤다. 사실 당시 사장님이 나만의 디자인과 컨셉을 공장에 내려보라 했었고, 그 사실을 아는 사장님과 공장은 그저 속으로 웃고 있었다고 한다. 이런 일들을 종종 보면서 그 사람이 정신병이 있나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이 일을 계기로 그는 거짓말 쟁이라는 딱지를 얻어 사장에게 신용을 잃는다.
아무튼 활기찬 투잡 회사 사람들 그리고 배움이나 좋은 디자인에 대한 갈증에 메마른 나와 대조적으로 종이컵이나 볼펜 꼬다리나 잘근 잘근 씹으며 흐리멍텅한 눈으로 낚시 동영상이나 보던 팀장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울화통이 터졌다. 그때부터 프레임 디자인 업그레이드에 대해 많이 이야기를 나눴던 것 같다. 결론은 말이 안 통한다 느꼈고, 그 사람은 안경을 좋아하지도 흥미도 없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저 잘못 먹은 짬밥만이 두툼한 뱃살을 찌웠을 뿐. 그는 낚시할 때 탈 차를 사느라 생긴 대출금, 딸아이 학원비 정도나 꼬박꼬박 대 주기 위해 그저 그 자리에 버티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그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돈으로 강북에 썩은 빌라를 매입했다는데, 돈은 부동산으로 벌자며 대선 당일 홍준표를 뽑고 누구 뽑았냐며 '보통 젊은이들처럼 포퓰리즘 정책보고 민주당 뽑은 건 아니지?'라 질문하던 그. 선거날에도 출근 시키는 이 부조리한 회사를 노동부에 신고하라고 하지만 본인은 안하던 그. 이후 문재인 정권에 집값이 올라도 하루 종일 욕하길래, 팀장님이 산 절대 안 오를 강북 빌라 가격도 올려주는데 이제 욕 좀 그만하시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이후 난 사무실에서 무슨 편이든 정치 이야기는 안 하려는 편이다) 나는 지금도 멀었고 그때는 더 볼품없었지만, 그 사람처럼 되지 말자고 굳게 다짐했던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침묵을 배웠다.
시간이 지나 게으른 팀장은 일거리를 나에게 미뤄댔고, 그가 할 일들을 대부분 처리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는 '컬러별 발주량 지정' 외로 컨셉 기획, 디자인, 샘플 관리, 수출입, 중국/한국 공장과의 커뮤니케이션과 관리 까지 나에게 일임했다. 을 업체에게 '내가 너한테 주문하는 거니까 날 대우해'라는 권리만 쥔 채로 사장님께 돈 이야기를 꺼내기 두려운지 결제 승인은 내가 사장님께 하라던, 이상한 시스템이 되었다. 잘 팔리는 컬러는 덜 나가는 컬러에 비해 큰 판매 속도 차이가 나기 때문에 명확한 수량을 예상하고 넣어야 한다. 그러나 그가 하는 유일한 일인 '컬러별 발주량 비율' 조차 아무 생각없이 그저 n/1로 주문을 넣었고 항상 잘 팔리는 컬러는 수량이 부족하고 덜 나가는 컬러는 재고가 남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영업관리팀도 물류팀도 그게 왜 그러는지 몰랐고 응당 그러는게 관례라 생각했다. 이런 모습들을 보며 구조와 시스템이 없는 회사라 생각을 많이 했고 이 미지근한 냄비에서 튀어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반년쯤 지나 사장이 뭘 물어보면 내용을 모르던 팀장은 헛소리를 하다 결국 나에게 대답하라는 눈빛을 보냈고 그게 지속돼, 항상 자연스레 내가 대답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나는 그저 사장님 하는 말에 토 달지 않아 점수가 깎이지 않는 선에서 오래오래 그 자리에 있으면 되는 YES맨 팀장과 대조적이었다. 아닌건 아닌거 같다고 이야기해서 사장도 젊은 나를 썩 달가워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래도 일적인 대화가 오고가며 나와 사장의 관계가 좋아지자, 자리의 존속에 위험을 느낀 팀장은 유치하게 업무지시를 안 하고 갑자기 사장 앞에서 일이 잘못되었다며 야지를 준다던가, 둘만 있으면 별 히스테리를 부리거나, 사장에겐 앞에서 본인이 해결했다고 하고 뒤로는 나한테 해결하라고 하는 둥 최악의 모습을 보여줬다. 나는 정말 마음이 아픈 사람 옆에 있으면 나도 힘들어 진다는 것을 크게 깨달았다. 이후 나도 그 사람에게 스트레스를 너무 받으니 어디서 하는 이야기라고는 그 사람에 대한 욕이 대부분이었다. 방사능처럼 부정적인 언어들에 무방비로 노출되니 나도 미쳐가고 있었다. 어느 순간 관심도 없는 누군가에게 타인의 흉을 보는 내 모습이 그 팀장과 너무 닮아있어서 도저히 여기 있으면 안 되겠다고 결심했다.
예상 퇴사는 10월쯤. 왜냐면 안경 비수기엔 성수기 때 벌어 둔 돈을 풀어 월급도 주고 신모델 개발도 하는 시기이기 때문에, 사장님도 월급 주기 힘들 테니 그때 쯤 그만두자고 마음먹었다. 하루는 하던 일들 잘 마무리하자 란 마음으로 회사에 출근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별 트집을 잡으면서 지랄을 하더라. 나도 그 자리에서 퓨즈가 나가, 이번달 까지만 근무하겠다. 안경업 박봉이라 나이 서른에 결혼도 못하겠어요. 당신이 말하는 안경업계는 연봉이 다 그렇다하니 다른데 가도 똑같을테니 나는 하반기 취업 준비하고 공사에 입사하겠다. 고 말했다. 아마 최악의 히스테리를 그 때 들었던 것 같다. 그럴 거면 안경 왜했냐 끈기없는 놈아, 난 안 뽑으려고 했는데 이 과장이 뽑자고 애원해서 뽑았더니 어쩌고. 끝까지 남 탓을 하는 그에게 정말 질려 그냥 네네 죄송합니다 하고 이후로는 대꾸도 안 했던 것 같다. 자기가 말하면 이상하니까 사장한테는 직접 말하라고 하길래 알겠다했다. 사장이 왜 퇴사하냐고 물어보면 휴가가 너무 적어서 힘들다고 말하라고까지 정해줬다. 나가는 마당에 회사 직원들(본인)위해 좋은 일 한다 생각하고 응? 하며. 다시 생각해도 골 때리는 워딩이다. 원래는 이직 준비하고 떠나자고 생각했지만, 이때부터 아마 나의 사고에 변화가 생겼던 것 같다. 가끔은 그냥 지르고 보는게 좋다는걸 배웠다. 그리고 그렇게 밀어 던지는 순간부터 다음 일이 알아서 시작된다.결혼이 그렇고 아기가 그랬고 작업실이 그랬다.
하튼 하루 이틀 뒤 사장님께 말씀드리니 그 자리에선 알겠다고 하시고는 다음 날 낮시간에 카페로 나를 부른다. 왜 그만두느냐. 뭐, 나가는 마당에 남아있는 사람 일하기 힘들게 만들기 싫어서 팀장에게 말한 그대로 말해줬다. 이후 네 번 정도 더 부르더니 계속 같은 말씀 하셨고, 연봉은 내년에 올려주려 하니 남으라고 하시는데, 연봉 베이스가 바닥인데 올려봐야 얼마 올릴 건지 뻔했고 계속 거절했다. 얼마를 준다 한 들 더이상 저 팀장 아래에 있고 싶지 않았다.
내 의도와는 다르게 팀장이 잘리는 결정적 사건은 결국 9월 중순경 선글라스를 브리핑하는 자리에서 터졌다. 보통 안경 업계 루틴상 다음해 봄 선글라스 신상을 위해 5월부터 준비 8월까지 샘플링 완성, 9월 컨펌, 이후 1~2달간 수정과 컬렉션에 넣거나 빼는 과정 후에 10월 11월에 최종 모델이 공장에 대량 발주 들어간다. 그러면 1월 정도에 카운터 샘플이 들어오고 2월 구정 전 모든 제품이 들어와 구정 이후 판매하는 방식이다. 이후는 6월까지 이른바 안경 & 선글라스 성수기다. 보통 이 시기에는 소비심리가 터지기도 하고 신제품이 많이 나오는 시기라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안경들도 선글라스가 안경원으로 팔리면서 같이 딸려 들어가는 경향이 있다. 또한 새학기이며, 학생들의 신체검사 이후 안경을 많이 맞추는 시기다. 신제품은 타사 제품과 생뚱맞게 다르지 않은 선에서 적당히 브랜드 느낌을 녹여내 출시하는 게 포인트다. 한국인 특성상 너무 다르면 안 팔리더라. 그러나 그런 성수기를 맞이하기에 최종 선글라스 샘플들은 역부족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의 사고는 일 년 동안 본인은 선글라스만 만들면 되는 자리라 생각했고, 히트작 한 두 개만 잘 파는 게 그의 할 일이라 생각했다. (당연히 도수테는 등한시되었고, 그 보수적인 도수테 판에 대한 감이 그 나이 먹고도 없었다.) 문제는 그의 자존심인 선글라스 조차 사실은 중국 공장에 남들보다 한 발자국 늦게 가 다른 회사에서 발주한 디자인 샘플들을 주워 오는 게 그의 업무 스타일이었는데, 일반 소비자도 아는 그 선글라스 시장조차도 읽지 못했다는 것이다. 전에 돌았던 도면들을 긁어모아 올해 유행했던 대로 짜깁기를 해 공장에 보내면 충성스러운 공장은 그에 맞춰 샘플을 만들어주는 형태였는데 그 해에 그는 그것 조차 안했다. 그 해, 아니 이미 그전부터 메탈 프레임의 선글라스가 유행했는데(레이벤 생각하면 됨) 그 충성스러웠던 공장은 전 해에 선글라스 주문량이 썩 많지 않았던 팀장을 위해 모든 샘플을 넘겨주지 않았다. 혹은 유럽쪽 디자인이 많아 최근들어 급 부상하는 한국적 디자인과는 동떨어진 컨셉들이 대다수였다. 가볍고 패셔너블한 메탈프레임이 아닌 적당히 썩은 테들을 꺼내주니 트렌드에 전혀 맞을 리가 없었다. 이전부터 늙은 팀장은 시장 조사하러 나간다 하고 카페에서 낮잠만 자다가 오던 일이 대부분이었고 이젠 그 댓가를 치를 때가 된 것이다. 결국 그는 그냥 일 이 년 전에 나온 히트작에서 다른 브랜드 다리를 끼운 정도로 서 너 모델, 게다 수량 맞추려고 작년에 통과 못한 모델까지 꺼내 브리핑 준비를 했다. 나는 퇴사할 예정의 사람이었고 이 사람이 자신 있어하는 부분이고 꽁꽁 숨겨 혼자 진행하던 일이라 알아서 하겠거니 하고 있었다. 샘플들을 매만지며 어떻냐고 연신 물어보는 팀장에게 침묵을 배웠던 나는 진실을 말하지 않고 적당히 괜찮은거 같다고 대답했다.
브리핑 당일 아침 라이터 기름으로 선글라스들을 반짝반짝 닦아서 모델별로 진열했다. 팀장의 브리핑이 시작되고 열심히 만들었다는 둥 잘 팔릴 거라는 둥 트렌드에 맞는다는 둥 헛소리 같은 개소리를 내뱉는 팀장과 사색이 된 영업사원들을 보는 장면은 가관이었다. 나는 참여도 안 한 선글라스 디자인을 같이 했다고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억울하고 부끄러워 귀까지 빨개졌다. 침통한 표정의 영업사원. 이딴 걸 어떻게 팔라며 소리 지르던 노인 영업사원. 머리를 쥐어뜯는 사장, 반박하느라 진땀 빼다가 결국은 안 팔면 될 거 아냐!라고 외치고 사무실 밖 어딘가로 뛰쳐나간 팀장..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그가 뛰쳐나가고 영업팀은 '솔직히 이걸.. 쪽팔려서 어떻게 파냐..' 등등의 옅은 소회를 드러냈다. 사장은 팀장이 뛰쳐나간 사이 바로 나를 따로 불렀다. 디자인 팀장 할만한 다른 사람이 있느냐고. 나는 한 분께 연락을 드렸지만, 안경업 떠났다는, 그리고 스타일 상 우리 사장님 하고는 맞추기 어려울 거 같다는 답변을 들었다. 사장님은 깊은 고심에 빠졌다.
결국 나는 9월 30일에 퇴사하고 2018년 10월이 되었다. 나는 일본으로 도쿄로 날아가는 티켓을 끊는다. 안경의 성지 후쿠이현으로 가기 위함이었다.
다음 글
안경회사 퇴사와 재입사 (2)
퇴사를 하고 일본으로 날아간 이유는 후쿠이현에 있는 일본 안경 공장에 꼭 가보고 싶었던 것과 조만간 도쿄에서 있을 ioft2018에 가서 일본 프레임들의 진수를 맛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짧게 ioft�
beos.kr
이전 글
2018년 9월 퇴사
현재 디자인 팀장이 된 후 예전에 썼던 글을 읽으니 부끄러운 점이 있다. 웃기는 건 저 때 사원이었던 나와 지금 나와 같이 일하는 사원, 그리고 지금 내 위치였던 나의 상사였던 사람과 지금 나�
beos.kr
'dia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0년 7월 신과장 일기 (0) | 2020.07.01 |
---|---|
안경회사 퇴사와 재입사 (2) (0) | 2020.06.29 |
저출산과 임산부석 (0) | 2020.06.25 |
하드 정리 중 나온 2015년 사진 세장 (0) | 2020.06.24 |
2020년 6월의 작업실 (0) | 2020.06.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