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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획'

beos 2020. 6. 15. 18:55

몇 해의 시즌을 예상하고 큰 그림을 그려두지만, 나와 같은 작은 회사에서 시장을 주도하기는 어렵다. 해체주의니 미니멀리즘이니 해체주의를 통한 미니멀리즘이니 등등 좋은 단어들을 들고 세상을 놀라게 하는 팀들이 있는 반면, 그런 팀들이 만들어 놓은 시장의 '판'에 숟가락을 얹는 형태가 비일비재하고 우리 회사도 피해 가기 어렵다.

 

물론 안경을 패션의 영역으로 본다면 그런 해석이 되겠지만, 나는 썩 트랜드의 영역이라기보다는 공학과 디자인이 2:3 혹은 3:2 정도로 섞인 제품의 영역이라 생각하는 편이다. 그렇다고 패션 영역을 놓치는 건 아니니 공학: 디자인: 패션 = 1:1:1 정도로 섞인다고 해두자. 여기서는 디자인을 패션 디자인이 아닌 사용자를 위한 디자인이라 정의한다.

 

아무튼 기획을 해보자. 보통 브랜드들은 s/s 나 f/w 두개로 나눠서 제품을 출시하는 편이지만, 우리 회사는 매달 3~5 모델씩 출시한다. 그중 잘 나가는 제품은 재주문을 하고 덜 나가는 제품들은 다 팔려서 재고가 0이 되길 학수고대한다. 보통은 마케팅이나 할인을 통해서 재고를 없애거나 잘 나가는 모델을 더 폭발적으로 나가게 하지만 나의 회사는 마케팅 0의 제품으로만 가는 회사라 제품이 좋아서 입소문 타게 만드는 것이 장땡인, 실기 100프로의 입시와 같다.

 

대략적인 컬렉션의 개수, 사이즈, 쉐잎, 재질, 기능, 캐쉬카우를 나눠보는 중

 

보통 시선을 잡고 그 브랜드를 인지시키는, 혹은 연예인을 씌워서 노출하기 쉬운 이른바 '노출용 모델' 혹은 '구색' 이라는 명목의 제품들을 한 두 모델 기획한다. 일반인은 소화가 어려워 절대 잘 팔리지 않으므로 최소 수량만 진행하지만 구조가 복잡해 적은 수량은 공장에서 뽑아주지도 않아 속 썩이는 모델군이 된다. 나같이 안경을 좋아하는 사람은 반쯤은 컬렉팅의 의도가 있기 때문에 이런 모델을 구매한다.

 

캐시카우가 될 무난하고 익숙하지만 잘 팔릴 거 같은 제품도 몇 개 기획한다. 여기서 삐끗하면 망하는 건데, 보통 발주를 더 많이 넣기 때문이다. 안 팔리면 대량 재고가 될 가능성이 높고, 다른 브랜드와 겹치기 쉬운 누구나 있는 프레임이기 때문에 한편으로 위험한 제품군이다. 유니클로라고 치면 후드나 무지 티, 팬티 같은 기본 템이라 생각하면 되겠다. 나는 주로 여기에 집중하는 편이다. 별다른 디자인이 없지만 단가 고민도 많이 들어가고, 사실 가장 디테일해야 할 제품군이라 생각해서 샘플도 많이 뽑아본다. 대중을 노리기 때문에 사이즈도 평범해야 하고, 컬러도 빤히 있는 컬러로 가야 해서 자아실현하기는 어렵지만 분명 재미있게 건드려 볼 부분은 존재한다. 찾아서 다른 제품과의 차별성을 꾀하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아무리 무지 티라지만 다 같은 무지 티는 아니다. 물론 아무 생각 없이 타사 제품을 카피하는 애들도 참 많다. 공장에서 개발했다고 들고 왔는데 괜찮아서 출시하니 타브랜드에서 먼저 출시. 본의 아니게 우리가 카피한 회사가 되었던 적도 있다. 뭐 이런 제품군이라면 뿔테로 치면 아넬, 메탈테로 치면 원형 프레임을 생각하면 되겠다.

 

마담 프레임도 두 개쯤 기획하자. 전에 아줌마들은 좁고 가로로 긴, 보석이 많이 들어간 안경들을 썼는데, 요즘은 젊은애들 안경처럼 둥글되 다리는 미니멀한 포인트 정도가 있는 테를 즐겨 쓴다. 가볍고 주름에서 시선을 분산시켜주는 그런 테를 좋아한다.

 

아저씨 테도 만들어보자. 성인테라고 부르는데 스퀘어 안구에 최고급 소재를 때려줘야 한다. 퓨어 티탄이나 베타티탄을 넘어 방탄소재인 nxt니 스펙으로 바르고 들어가는 파트가 이 파트이다. 외제차 같은 디자인도 나오고 약간은 투박하되 저렴한 라인도 뽑아준다. 소재를 떠나 템플에 기능이 들어가야 좋아하는 파트이므로 엔지니어적인 성향을 마음껏 뽐내는 파트이기도 하다. 마담이나 성인 프레임은 초반에 빠른 속도로 시장에 퍼져 채워지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도 느리지만 꾸준히 소화가 된다. 덕분에 초도 수량을 크게 발주해도 마음이 편하다. 앞으로는 나이 든 사람이 많다는데 그들이 젊던 시절의 패션과 프레임을 찾아보면 좋겠다.

 

위에는 성별이나 안경의 성격으로 나누었다면, 저 안에서 소재와 쉐잎으로 또 잘게 나눠준다. 웹페이지나 안경 판에 넣고 영업할때 다채로운 것이 흥미를 끌기 때문이다. 몇 시즌을 메탈로만 뽑으니 더 이상 할 게 없던 적이 있다. 아무래도 원형이 많이 나가는 편이니 50프로, 나머지 스퀘어나 루프탑형 다각 등등으로 다채롭게 채워준다.

 

공장에 따라서 기획이 달라지는 경우도 종종있다. 보통 잘하는 분야들이 있기 때문이다. 어디는 사출 테를, 어디는 아세테이트를 잘 깎는다던가, 연마로 광빨 죽이는 공장도 있고 메탈을 저렴하게 하는 곳, 티탄을 잘하는 곳 등 각기 특색들이 다르기 때문에 적당히 섞어준다. 사실 한 공장에 전 제품을 주문하는 것이 좋다. 갑으로써 대우를 받는 것도 왕왕 있으며 아무래도 여기저기 연락하는 것보다는 컨트롤 하기가 편하다. 그러나 공장에 문제가 생기거나 갑자기 어떤 모델은 빠르게 받아야 하는 상황이 있는 경우에 대처하기가 쉽지 않다. 관행에 따라 나는 국내외 여러 공장에 배분해서 주문하는 편인데 공장에서 항상 주문량이 적다고 되래 한소리 듣는 편이다. 사실 다 합치면 왠만한 안경회사들 발주량보다 많은 것을 그들은 모른다. 

 

프레임의 제작기간은 재주문의 경우 2, 3달. 부속이 준비되어 있다면 한 달 반 정도 걸린다. 디자인부터 새로 시작하는 경우 부속 설계, 부속 발주, 테스트, 샘플링 등등 기본 6개월에서 1년 정도는 걸린다. 덕분에 패션이나 IT처럼 굉장히 빠른 속도로 유행이 변하지는 않는 편이다. 그러나 지금 트렌드에 맞춰서 만들었다가 반년에서 일 년 뒤에 받는다면 소비자의 입맛이 변해 안 팔릴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주의를 할 필요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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