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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 런칭기_3 (후기) 본문
2020.11.09 - [분류 전체보기] - 브랜드 런칭기_2 (미팅과 비용 협상)
브랜드 런칭기_2 (미팅과 비용 협상)
브랜드 런칭기 1화를 쓰고 미팅은 이후 2번, 메시지와 통화는 몇 번 오고 갔다. 많은 대화를 하고 느낀 점은 업체가 이 업계를 너무 모르면 서로 어렵다 였다. 새로운 사람들이 안경 업계로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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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1년 전 이야기다. 지금이 2021년 11월로 넘어기가 한 시간 반 전이니까. 문득 연락 온 지인이 작년에 진행하기로 했던 브랜드 일은 어떻게 되었는지 물어보는 김에 후일담을 정리한다. 주말 동안 육아에 지쳐 아기 재우면서 반쯤 잠들었다가 아내가 회사 복지로 나온 한옥 숙박권이라고 해야 하나 그거 오늘 밤 12시에 예약인데 그거 하래서 얼떨결에 깬 김에 한 시간 반 동안 할 건 없고 블로그 글이나 써야겠다 싶어 맥주 한 캔 따고 끄적인다. 아직도 사려고 했던 뱅엔 울룹슨 엘피 플레이어는 못 샀고, 해외여행을 안 가도 돈은 남지 않았으며, 주식들은 눈팅만 하고 있었는데 다 떡 상해 버렸다. 나는 이렇게 기회를 날려버리는 인간인가, 아니면 결국 내 것으로 만드는 인간인가. 나도 알 수가 없다.
이젠 기억도 잘 안나는 이야기들이지만 몇가지 포인트는 있다. 당시 이태원에서 멋쟁이 젊은 사장 둘과 미팅을 했고, 브랜드 론칭은 봄에 하자며 연 초에 연락을 준다 했으나 결국 오지는 않았다. 뭐 그게 맞는 일이지 은근 일 시작했으면 피곤했겠다 라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이런 아사리 판에서 새로운 브랜드로 치고 들어온다는 건 엄청난 혁신을 해도 모자랄 판에, 전에 적었던 스토리로는 쉽지 않았을 거다. 개인적인 상황으로는 전에 회사를 다니고 있었으면 그 일까지 쳐내면서 충분히 공장도 다니고 샘플도 만들어보는 등 시간을 많이 보낼 수 있었겠지만, 지금의 나는, 이 회사 특성상 절대 그런 일들을 겸하기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할 수가 없어서 못했을게다. 아마 다른 아이웨어 디자이너에게 일을 넘겨줬을 수는 있겠다.
이번 건 말고 몇 년 전에 다른 온라인 브랜드 디자인 외주를 해주면서 회사를 다닐땐 속도 편하고 꽤 넉넉했던 거 같다. 월급이야 쓰고 하던 대로 좀 모으고, 외주로 번 돈으로 아이맥도 최고 사양으로 사고 아파트 중도금도 모으고 했으니까. 그랬던 내가 지금은 많이 변했다. 이후로 결혼도 하고 애기도 생기고 (벌써 돌이다) 둘째도 생기고, 이직도 하고 인생을 바꿀 돈을 어떻게 만들 수 있나 생각도 한다. 그때 외주로 돈을 벌어서 테슬라에 넣거나 카카오, 네이버에 넣었다면? 매 달 백 이백씩 주식에 넣고 2년이 지났으면 지금의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가끔 상상해보지만 상상이 안된다. 나는 주식에 매달 그런 돈을 넣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버는 외벌이 직장인 월급은 그냥 우리 네 가족의 생활을 위한 돈으로 끝인데, 그럼 이제 이 수준으로 평생 살아야 하는가? 라 생각하면 또 우울하다. 몇 단계 치고 오르고 싶은 생각뿐. 그저 순수하게 안경이 좋다고 이 판에 기어들어와 젠몬까지 운 좋게 왔으면 감사해하면서 직장 생활에 만족하고 한편으로는 디자인과 회사의 압박에 허덕이며 살아갈 수는 있겠지만, 우리 네 가족의 가장이 된 이상 순수하게 안경 좋아해서 '저 안경 좋아해서 왔어요'라는 러블리한 이야기와는 차원이 달라졌다. 최우선 순위는 생존이다. 그게 회사건 이 판이 건간에. 퍼포먼스가 생각보다 안 나와 위기인 적이 꽤 있었고, 내가 잘하고 좋아하는 포지션이 회사에서 무쓸모인 능력이 되어 입지에 대한 고민이 많을 때도 있었지만 빠르게 다른 것들도 습득하는 수밖에 없다. 그게 내가 추구하는 디자인의 방향은 아닐지언정, 회사에게 맞추다 보니 나도 점점 변해감을 느끼고 이제는 이 루틴이 자연스럽다 느껴지며 편안해진다.
다시 전에 외주 이야기로 돌아와서 (지금의 입장에서 봤을 때) 나는 팔리는 디자인을 잘 못했는데 외주를 했었다면 상대방에게 큰 결례를 범할뻔 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보던 시장은 전 회사의 입장에서 보던 시야였고, 지금의 내 눈은 젠몬 안에서 보는 디자이너 시각인데 어찌 되었든 전에 내가 그리던 디자인도 구렸다고 시장을 보는 사고방식도 편협했던 것 같다. 잘 팔리는 선이 뭔데? 라 하면 나도 안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모르겠습니다! 브랜드마다 먹히는 선이 다르기 때문이고 나는 이제야 몇 가지를 느껴본 수준이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그저 조금 더 겸손하고 조금 더 숙이고 어떤 게 더 팔리고 어떤 브랜드를 소비자들이 선호하는지 혹은 세상이 어떻게 미쳐 돌아가는지 관망할 뿐이다. 그리고 팔린다는 건 디자인의 영역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가, 그건 기본이라는 생각도 든다. 최소한 아무리 기믹이라 한들 잘하는 구석이 있어야 빨아주는 거니까.
이전에 언급했는데 남자가 티타늄 테를 좋아하고 여성들이 더 아세테이트 선글라스를 좋아하고 이런 것도 아니고, 그냥 최고는 뭐가 어찌됐든 이쁘고 새로운 거. 못 봤던 느낌? 못 봤던 거? 그리고 의미 있는 셀럽이 쓴 게 장땡이다. 뻔한데 셀럽이 쓴 건 딱히 의미 없고.. 티를 내야 한다는 의미인데,
여하튼 기믹의 세상이다. 그저 알려지는게 먼저다. 눈에 띄어야 한다. 내가 추구하던 '써보니, 알고 보니 참 좋더라'가 아니라 '그냥 스치다가 보니 좋아 보이더라'가 우선이 되어야 함을 인정해부럿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