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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20 남편의 역할 본문
아기가 태어나고 아내와 나의 관계에 어느정도 변화가 생겼고 드는 생각을 정리한다. 아마 시간이 지나면 또 달라질거 같긴한데, 지금은 그렇다는 것.
연애의 시작은 여자가. 결혼의 스타트는 남자가 끊는 거라 했다. 요즘 유부남 유부녀의 삶의 칼자루는 아내가 쥐고 있는 거 같다. 우리 부모의 세대와는 많이 다르다.
나는 낮에는 일하고 퇴근 후, 아니면 주말에는 작업실로 가 뭔가 실현시켜보려 애썼다. 출근 전이나 점심 시간엔 매일 수영을 다녔다. 혼자 살았으면 몇 년 쓰고 버릴 제품이 아닌 아무래도 둘이 쓰다보니 서로 취향에 맞는 제대로 된 제품들을 구매하기 시작해서 집이 점점 마음에 들어갔다. 그녀나 나는 마음에 드는 거 사고 싶지 애매한 건 딱히 사고 싶은 게 없는 사람들이라 집에 그다지 물건도 없어, 서울의 소형 아파트가 그다지 좁다는 느낌은 없었다. 출장 다녀오면 나름 값 좀 나가는 수분크림이나 향수 정도 선물 사오는 조그만 사치도 부리면서 지낼만했다.
아내도 새벽에 요가 수련만 다녀오면 하루가 평온한 사람이다. 새벽 다섯 시에 나가서 여섯 신가 일곱 시 수련을 하고 내가 출근한 후에 들어온다. 조용한 집에서 온라인 코칭 좀 하다가 저녁에는 코칭이 있는 날도 있고, 없는 날도 있고, 요가 선생님으로 수업이 있는 날도 있어서 나갔다 들어오면 그녀에게 충만한 삶이었다. 조금 바쁘거나 심심해 보여도 앞에 미술관도 있고 공원도 있으니 나였으면 혼자 잘 구경하고 아이스크림 하나 먹으면서 집으로 돌아왔을 법하게 조용하고 고요하게 지내고 있었다. 주에 두 번은 만나는 나와는 다르게 한 달에 한 번쯤은 친구를 만났다.
처음 결혼 준비를 하면서 돈 관리는 누가 하네, 수입이 누가 많네 누구 집안에서 돈을 더 가져온다는 둥 어린 소리들을 하면서 한달 반 정도 싸웠지만, 그런 네이트 판에서 나온 이야기들에 현혹될 건 없었고 그저 믿고 둘을 하나로 생각하니 모든 게 해결이었다. 이건 마치 인간의 상체와 하체가 서로 내가 더 일을 많이 한다고 싸우는 격이랄까. 마음가짐이 바뀌니 생활도 순조로웠다. 누구를 온전히 믿고 맡긴다는 건 나에겐 없던 일이지만 배워갔다. 남들은 결혼 초에 많이 싸운다던데, 우리는 연애만 6년이라 그런지 그런 것도 없었다. 아내가 요가를 하면서 평온하면 우리 집안은 한없이 고요했고 난 그게 좋았다.

그런 우리에게 아기가 생겼다. 오늘은 태어난 지 한 달 +3일째다.
삶은 아기 중심으로 돌아간다. 집 배치, 방 구조, 내가 작업실을 가는 시간, 약속, 대화, 퇴근 후의 삶. 모든 게 아기를 위함이다. 낮 시간에 아이를 봐주는 선생님이 돌아가고 나면 내가 집에 가는 2시간 정도 혼자 아이를 보던 아내도 지쳐있다. 아내는 유일한 분출구인 요가를 못 가므로 스트레스가 꽉 차있다. 남편이 다정하게 말해줘도 본인이 해결되지 않았기에 소용이 없다. 참을성이 부족한 나도 그 태도에 한두 번 참다가 반응을 한다. 결혼한 친구의 말에 의하면 '스트레스의 공명' 스트레스가 벽을 치고 튀어나오고 상대에게 닿고 상대는 더 세게 받아치면서 나에게 오고 이 과정이 반복하다 보면 싸움으로 번진다 했다. 나는 아직 그 정도는 아니라 생각하지만 조짐이 확실히 보인다. 우리는 아기를 돌봐줄 가족들도 주변에 안 계신다. 당분간 혼자 벌어야하는데 나는 이제 수입을 고민한다. 시스템이 잘 갖춰진 작은 회사지만 구조적으로 영업이익이 커지지 않으면 더 요구할 수도 없다는 걸 안다.
남녀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도록 시스템화 되어있는 이유는 아마 호르몬의 차이가 이를 관장한다 생각한다. 확실히 아빠가 대하는 아기와, 엄마가 대하는 아기의 결은 너무나도 다르다.
여자는 남자보다는 호르몬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아이가 생기면 육체의 시스템이 바뀌면서 마음도 달라진다. 아이를 낳고 나면 또 다시 변화한다. 남자는 바뀔 게 없으니 그냥 똑같이 아내를 대하지만, 아내는 그 1년 사이에 육체와 정신의 흐름이 몇 번 변한다. 더 이상 그녀의 세상은 남편과의 세상이 아닌 아기와 엄마가 중심인 세상으로 바뀐다. 싸움의 출처는 그대로인 남자와 변한 여자 그 사이에서 발생할지도 모르겠다.
남편들이 아내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살살대는 모습을 보면서 전에는 고추를 떼야한다며 혀를 끌끌 찼었는데, 이제는 그것이 결국 현명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내가 미간을 찌푸리는 이유는 남편이 크게 싫어서라기 보다는 심적인 스트레스를 해소할 대상이 없기도, 감성적인 교감보다는 이성적으로 접근하기 때문인 부분도 있다. 이를 알아차리고 말로만 뭐 수고했다고 해봐야 아내는 그저 건조한 표정을 지을 것이다. 이에 결국 남편이 그 말 조차 안 하다 보면 우리가 알던 전통적인 부모의 모습이 되어갈지도 모른다. 또한, 아내는 대화 상대를 결국 자신을 이해해주는 외부에서 찾게 될지도 모른다. 온라인 커뮤니티나 의심스런 등산 동호회 등등이 그것이다. 아내들은 김창옥 같은 입에 발린 말들을 더욱 애타게 찾아 헤멜 것이다.
어디서 내 글을 보고 아내나 여자 친구한테 가서 '자기 그거 호르몬 때문이래'라고 말했다가 본전도 못 뽑지 말고 '응 내가 싫어서 그러는 게 아니구나.' 정도로 이해하고 이해해보자는 의도의 글이다. 남자의 단순한 구조는 생존과 번식에 쉽게 되어있지만 복잡한 여자라는 생명체를 이해하기는 어렵다. 모르겠으면 암기해야한다.
무엇보다 이런 고민들은 잘생겼다면 필요가 없다. 증언에 의하면 아내가 화가 났다가도 남편 얼굴만 보면 풀린다더라. 내가 남편의 역할에 고민이 많은 이유는 그 가장 중요한 능력치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인가보다.
하나의 부재는 하나의 특기를 크게 키워주리라 믿으며 오늘의 잡념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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