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os
2020.1.24 00:30에 썼던 글 본문
업계와 나
요즘의 업계를 보고있으면 2000년대 중반 이말년, 주호민, 기안84 등의 웹툰 작가들의 초기작들이 생각난다. 2000년대 초반의 한국 만화계는 처참하기 이를데 없었다. 인터넷의 발달로 이미지 파일이 어느 정도 준수한 속도로 다운로드가 가능해지자 불법 스캔본이 사설 와레즈를 떠돌기 시작했고 그나마 근근히 버티던 주간지, 월간지가 폐간 위기로 몰렸으며 만화가들은 만화 대여점에 특화된 김성모식 공장형 만화(그림은 큼지막하고 강건마의 108계단을 108장에 걸쳐서 묘사해놓는 등 만화책 권수를 늘리는 온갖 꼼수를 사용함)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 시절 만화가를 꿈꿨던 이들은 거의 80, 90년대 황금기에 쏟아져나왔던 일본의 명작들을 바라보며 꿈을 키웠던 사람들이니, 한국에선 현실적으로 그런 만화들이 등장할 수 있는 시스템이 없다는 자각을 하게되면서 절망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많은 이들이 아예 다른 업을 찾아가거나 캐릭터 디자인, 일러스트레이터로 전향하게 되었던 것 같다.
그런 이들이 못다핀 꿈을 작게나마 발산했던 것이 블로그에 일상적인 이야기를 짧은 컷으로 담아낸 ‘일상툰’이었다. 물론 수익없이 취미 삼아 하던 작업들이었는데, ‘마린블루스’ 등이 대박을 치게 되자 웹툰이라는 새로운 시장이 점차 열리게 된다. 물론 초창기 웹툰은 정교하고 웅장한 그림체와 호흡이 긴 스토리를 가진 정극 장르가 나올 수 없었다. 이러한 만화들은 스토리 구상을 위한 장기적인 투자와 수많은 어시들이 달라붙어야 가능하다. 혼자서 짧은 시간내에 작업해 업로드할 수 있는 고효율 저비용 형식의 만화만이 적합했다. 그런 독특하고 기형적인 시스템안에서 탄생한 만화들이 ‘이말년 시리즈’, 주호민의 ‘무한동력’ 등이다.
이렇듯 초라하고 슬프게 시작했던 한국의 웹툰은 이제 일본 시장도 넘보고 있다는 기사가 속속 올라온다. 주호민 작가는 쌍천만 영화의 원작자가 되었고 이말년 작가는 스트리머, 기안 84는 예능인으로 입지를 굳혔다. 물론 여전히 웹툰은 일본 만화 시장에 비해 만화 자체로 큰 돈을 벌 수 있는 구조는 아니다. 대신 무료라 대중적 접근성이 훨씬 유리해 인기작가는 높은 대중적 인지도를 얻을 수 있다. 이로 인해 부가적인 수익을 얻을 수 있는 독특한 구조로 발전했다. 여전히 베르세르크나 데스노트같은 어마어마한 작화력을 뽐내는 작품이 등장하기 힘든 구조지만, 컬러를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 덕에 일본 만화와는 전혀 다른 노선의 경쟁력을 확보했다.
현 시점의 한국 패션 시장은 순수히 디자이너 브랜드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있어선 2000년대 초중반의 웹툰 시장을 보는 듯한 느낌일 것이다. 마르지엘라, 맥퀸, 꼼데가르송을 꿈꿨던 젊은 유학도들은 좌절하거나 외국에서 근근히 버티고 있지만 예상치도 못한 전혀 다른 시장은 급속도로 팽창중이다. 접근성 낮고, 적은 돈으로도 쉽게 창업할 수 있고, 잘만 되면 대박도 꿈꿀 수 있는 시장. 문제는 저가의 티셔츠나 맨투맨을 메인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점. 어렵게 테일러링 기술이나 쿠튀르식 드레스 기법을 익혔던 이들에겐 진입하고 싶지 않은 곳이다.
아더에러는 이런 현실을 영리하게 이용하는 브랜드 중 하나다. 트렌드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되 난해하거나 가격이 높은 아이템은 제쳐두고 철저히 한국 시스템 하에서 팔리는 품목에 집중한다. 하지만 이를 또 뻔하게 풀어내지는 않고, 영상이나 웹사이트 등 프로모션 수단은 최대한 불친절하고 난해하게 제시한다. 으앗하고 집중했다가 결국 살만한 게 티셔츠랑 후드라는 점에서 실망하다가도 결국 한두개는 사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젠틀몬스터도 되래 아더에러보다 빠르게 나온 선구자였는지, 순서는 잘 모르겠지만 비슷한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살 모델은 한정이 되도록 세팅을 해놓고 (기성화, 프레타포타), 나머지 보여주는데 있어서는 최대한 불편하게 만들어 사람들을 애타게 만든다. 공간, 웹상의 영상이나 오뜨쿠튀르 제품라인 같은 경우라 생각한다. 아니면 내가 그냥 생각이 많은걸지도. 그저 그게 예쁘거나 팔릴거라 생각해서 디자이너는 최선을 다해 디자인하고 제작자는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한국에선 앞으로도 레이가와쿠보, 마르지엘라, 알렉산더 맥퀸, 혹은 버질 아블로나 사무엘 로스같은 인물은 절대 안나올 거다. 준지나 우영미는 뭐냐고 묻는 분들이 계시겠지만 그들은 김연아급 기적에 해당하고 그 이상의 위상을 가진 인물들이 계속 나오려면 시스템이 만들어져야 한다. 위에 언급한 천재들은 시스템의 산물이다. 다만 전혀 다른 위치에서 전혀 다른 캐릭터를 가진 이들이 등장할 거다. 우리가 현시점에서 위대하다 느끼는 그런 방식의 디자이너들은 절대 아닐테지만 누구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인물들.. 90년대 임재범 등의 롹커들이 영국을 점령하겠다며 호기롭게 도전했지만 결국 영국 웸블리를 점령한건 BTS라는 아이돌인 것처럼. 지금의 나는 이 분야가 아니라 다른 분야를 새로운 시선으로 돌려봐야 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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