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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멜리아힐과 기묘한 인연들 본문
때는 2013년. 중고등학교 동창인 툴정이 '스퀘어드'란 필명으로 활동하며 RnB 비슷한 일렉트릭 사운드를 뽑기 시작할 때다. 당시 나는 기타 치는 또래들 중 톤과 리듬감이 좋아 fender telecaster를 곧 잘 치던 복학생이었다.
2인조 듀오가 성행하던 시절이었는데 다프트 펑크부터 10cm까지. 우리는 그 중간 어디 즈음에서 일정 사운드는 루프를 돌리면서 기타나 건반은 라이브로 해내는 형태를 구상했다. 짬짬이 학업 중 공연도 했는데 서울의 작은 카페에서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친 뒤 제주도에서 콜이 들어온 상황. 전액 다 대주면서 2박 3일간 제주 까멜리아 힐에서 숙박과 음식을 제공받는 대신 하루 공연만 뛰기로 조건이 들어왔다.
사실 스퀘어드가 곡 만들고 반주하는 둥 다 하는데, 공연 혼자 가기 심심하니 같이 가서 리듬 기타만 조금 튕겨주는 그림이었지 나는 있으나 마나인 포지션이었다.
8월. 곡 리스트를 정하고 이틀쯤 툴정의 골방에서 연습하고 약속된 공항으로 갔다..!

공항에서 몇몇 만나 비행기로 이동한다.



첫날 본 남자들은 소주 마시고 제주의 한 집에서 악기 들고 잼을 하며 끈끈한 무엇인가 느꼈던 것 같다. 전우애란 이런 것인가. 나비박과 고소귤 누나들은 앞전 공연을 마치고 늦은 비행기를 타고 와서 이미 친해진 우리들 사이에 어색하게 끼어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이내 소귤 누나는 성격이 아주 좋아서 바로 녹아들었다. 당시 여자는 음대에서 작곡을 한다는 이혜지 씨까지 셋이었는데 그 여자분들은 혜지 씨를 보자마자 왠지 싫어했던 기억이 난다. 남자들은 그러든가 말든가 술 먹고 신나게 놀았다.


다음날 아침. 공기가 좋아서 그런지 숙취가 없어서 깜짝 놀랐다. 아침부터 케이브맨은 볕 드는 발코니에서 기타를 치며 노랠 불렀다.


오전에는 집에서 쉬고 다들 리허설을 하러 나갔다. 야외 사운드인지라 소리를 잡는데 전문 엔지니어가 필요했고 내 기억에 꽤 많은 비용을 지불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 날은 비가 온다는 소식 때문에 카멜리아 힐에 사람들이 썩 오지 않았다. 여긴 원래 동백이 유명한 곳이라 겨울이 히트인데 여름에 사람들을 더 모을 콘텐츠를 개발 중이라 했다. 맥주도 마시고 도시락 먹으면서 야외에서 음악을 즐기는 페스티벌 시즌을 만들고 싶었던 차에 우리가 당첨되었던 것이다.

첫 음악은 혜지 씨의 포크로 문을 열었다. 탁하지만 자유로운 목소리에 그녀에게는 익숙지 않은 기타를 퉁겼는데 외국 올드팝들을 부르니 없던 카테고리의 음악들을 선사했다. 사실 그녀는 당시는 세션맨이었는데 지금은 이랑 투어 멤버에도 있고, 빅 베이비 드라이버와 콜라보도 했으며, 우주히피 등등 개인 솔로 앨범까지 낸 우리 중 가장 베테랑이 되었다. 그러나 가끔 올라오는 그녀의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을 보면 코로나로 인해 공연들이 취소되는 둥 고전을 면치못하고 막일을 뛰고 있다 했다. 옥상 타일 붙이는 일부터 상하차, 농장일과 집이 없어 친구 집에서 잠시 사는 둥. 장문의 인스타 글은 신기한 이야기면서 히피 같던 나의 그 시절을 이 사람은 아직도 살고 있구나 깨닫게 해 준다. 그리고 이내 안도의 한숨을 쉬게 만드는 힐링 같은 계정이다. 그 세계에서 빠져나왔음에 안도하는 한숨 말이다.

지금이야 케이브 맨이라 불리는 사내지만 엄연한 '콧수염 유치원'의 아티스트다. 포크에 가까운 그의 음악 장르는 당시 까혼이 유행했기에 까혼 영도를 영입하면서 한층 더 성숙한 라이브를 선사했다. 사실 혼자 기타 치면서 라이브로 20분을 채우기가 힘들었으리라. 뒤에는 자이언티와 같은 학교와 전공이었던 인목이다. 전날 밤에 툴정이 술 마시면서 수다를 엄청 떨었는데 나와 형들은 피곤해한 반면 이 친구는 무한동력과 같은 툴 정의 혀에 감탄하고 형이랑 꼭 친해지고 싶다며 엥겼던 친구 중 하나다. 실용음악을 하던 친구라 학원에서 애들한테 기타를 가르쳐주던 친군데 나보다 훨씬 테크닉적으로 잘 쳤다. 막상 제주에서 서울로 돌아간 뒤 연락이 바로 끊겼다는 게 함정이다.

좌측부터 영도형, 케이브맨, 인목이.
영도형은 원래 고 미술 복원사라는 희귀한 직업을 갖고 있었는데, 어디 소속되어 일하다가 최근엔 지방에서 사업체를 차려 직접 일감을 받는다 했었다. 그러나 지방을 꽉 쥐고 있는 큰 업체에게 치킨게임으로 밀려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한다. 그래도 우리 중 가장 먼저 결혼해 예쁜 딸아이를 낳아 인스타나 네이버 스토어로 소소하게 아기 옷도 팔면서 살고 있는 듯하다. 가끔 아이 사진 올라오면 좋아요 누르는 정도의 관계로 남았다.
케이브 맨은 내 결혼식도 오는 등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언젠가는 팀 '사스콰치'로 나와 툴정, 드러머 케이브 맨이 모여 프로젝트 밴드를 만들었으나 단 한차례의 공연으로 끝. 매번 해야지 해야지.. 만 하며 어언 삼 년쯤 지난 거 같다. 이제는 음악 하잔 이야기도 서로 안 꺼낸다.
맨 우측은 인목이 연락이 완전히 끊긴 사내다.



나비박은 당시 나비닷컴과 같은 개인 홈페이지도 갖고 두터운 팬층도 있던 홍대 언더그라운드의 실력 있는 뮤지션이었다. 온몸에 강렬한 타투와 빨간 머리. 나는 게이트 플라워즈를 좋아했는데, 그들과도 공연을 많이 했다며 술자리에서 으쓱하던 모습이 생각난다. 실제로 게플의 유베이스가 나비박의 스페이스 공감 공연에서 연주를 해줬다.
술 먹은 담날 아침 마당에서 옥구슬 굴러가는 목소리로 black bird 인가 비틀스의 across the universe를 불렀는데 헤롱대면서 이게 진정한 아티스트구나 란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목소리가 너무 좋아 라디오 방송 쪽으로 나가라고 엣된 조언을 했던 거 같다. 따로 연락을 하면서 살진 않았지만 한참 지나 그녀는 박 나비의 일생이라는 팟캐스트를 열었는데 한 번도 들어보진 않았다. 대충 보이는 인스타 피드로는 스탠딩 코미디도 용기 있게 하는 등 무엇인가 하고 있지만 순탄치 못한 인생을 겪고 계시는 듯하다. 무운을 빈다.
고소귤 누나는 목소리 좋고 위트있는.. 노래 잘하는 영어 선생님이었다. 막상 그녀는 계속 일하면서 결혼하고 인스타는 비공개로 전환했는지 보이지 않는다. 전에는 종종 보컬레슨이나 영어과외 구한다고 올라왔었는데. 우리들 중 그래도 무난하게 살고 있지 않을까. 당시는 꽤 나이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당시 그녀나이 30초반이었던거 같다. 아닌가? 지금의 나보다 어렸겠지. 원래 나비박과 같은 월세방에서 살고 있었는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뭔지로 흩어지고 연락은 안 한다고 소문을 들었다.





우리를 마지막으로 제주의 하루는 끝. 카멜리아 힐 대표님이 태워줘서 뒤풀이로 중앙시장 횟집에 갔다.

케이브 맨은 아주 오래 사귄 여인과 헤어지고 힘들어하던 이번 겨울 청첩장을 받으러 나와 툴정을 만났었다. 냉면이나 먹고 찍어 올리자는 심보로 재미를 위해 누들러 tv라는 냉면 인스타 계정을 팠는데 심혈을 기울이던 콧수염 유치원보다 팔로워가 많다고 씁쓸해했던 기억이 난다.
우측의 인목이는 죽지 않았을까 라는 이야기를 했던 거 같다.

뮤지션의 삶은 영세하고 힘든 것인가. 아마 그녀들은 아직도 음악은 하고 있지만 삶은 힘들어 보인다. 특히 나비박 누나는 어서빨리 예전의 새침한 모습으로 멋진 음악활동을 하길 바란다.
밴드 사스콰치의 보컬이자 작곡 작사가 툴정.
대학 초반. 경희대 축제에서 정엽의 나띵베러를 부르고 우승만 하지 않았더라면.. 가수의 꿈만 꾸지 않았더라면 그도 적당히 학벌 빨로 취업하고 순탄하게 살고 있지 않았을까.
다들 졸업하던 시기에 “툴정아 취업은 제대로 해놓고 음악은 만들기만 하자~”라고 조언했던 나와 그렇게 뻔하게 살지 않겠다던 툴정. 저작권료가 매달 쏠쏠하게 들어와 '자식보다 낫다!'라는 명언을 남긴 그. 점점 음원 수익이 주는지 집시에서 스퀘어드로 또, 정재주로 필명을 바꾸고 새로운 마음으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문방구, 스포츠센터 등등 거처 없이 돌며 저녁에는 음악활동을 하던 그. 툴정과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많다. 독한 엄마라는 전국에 보험 파는 일부터 말도 안 되는 기획사에 들어가 음악 경연을 하던 이야기들.. 보드게임방인 줄 알고 알바 면접보러 갔는데 하우스 포카치은데였나 키스방이었나. 또, 이름을 알리고자 문래의 한 라이브 카페에서 공짜로 열창했는데 술 취한 남자가 김광석 노래를 부르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던 일들. 속은 천상의 과일맛인 두리안인줄 알았는데 그냥 썩은 냄새나던 아티스트 착취 구조의 라이브 까페 사건.. 이렇게까지 일이 안 풀리는 게 말이 되나 싶었다.
그의 인생 또한 기구하지만 슬슬 '뮤지션'이라는 타이틀을 내려놓으면서 제자리를 찾아가는 듯하다. 결국은 삶의 무게에 못 버티고 안전한 직업을 찾는 툴정은 다람쥐처럼 쳇바퀴를 돌리며 대기업 계약직 연장에 사활을 건다. 전에는 음악 이야기나 주변인들 이야기였다면 요즘은 부동산이나 회사 이야기가 주를 이루는 우리다. 자리를 잡아가는 모습에 나도 마음 한켠을 내려놓음과 동시에 나이들어가는 ‘뻔한 어른’이 되어감을 체감한다. 한편 그와 나는 정책에 대해 이야기 할만한 부동산이라도 있음에 감사할 뿐이다.
사실 이후로 광흥창 갈메기살 모임으로 겨울철에 한번 모였으나 넘 멀고 우린 가난했고, 여인들의 신경전에, 툴정 여자친구가 연락이 안된다는 여러 이슈들로 속편히 놀지 못하는 등 불편한 만남이었는데 그 뒤로는 자연스레 까톡방에 대화가 없어지다가 어느 순간 누가 나가고 난 나오고 그들과의 인연은 끝이 났다.
이렇듯 카멜리아 힐에 모였던 그 사람들은 전생에 어떤 인연이 있었기에 이렇게 한 점에서 모였다가 저리 흩어지는지 기묘하기만 하다.
아 여담이지만 양정우 형님은 카멜리아힐 사장님이신데 손님은 안오고 비행기값에 술값 밥값만 엄청 나와서 한껏 취해서 우울해하던 기억이 난다. 문신기 형님은 객원으로 활동하는 일러스트레이션 이었은데 나름 유명한 제주 여행작가로 남았다. 나의 한 시절을 풍미하는 기억의 장소이자 인물들이다. 행복하시길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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