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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4월의 변화 본문
40년이 다 되어가는 자칭 도수테 명가 유통회사인 대광을 나와서 패션 아이웨어 회사에 왔다.
여기는 세 달의 인턴이라 정해진 평가기간을 거쳐야 정규직으로 전환이 되는 구조다. 경력직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방식이지만 한편으로는 잘해서 붙으면 되지 머 란 생각과 떨어지면 온 가족이 길바닥에 나앉는단 압박감이 교차했다. 전장에 임하는 태도가 달라진다. 위험을 알면서도 트라이하게 된 큰 요인은 나는 어디쯤에 있는지 궁금했고, 아이웨어 파트장과의 안경 토킹. 그리고 이 산업 끝 판에 존재한 이들의 속이 궁금했다.
제작비 상관 안하고 속 시원하게 디자인만 눈에 띄면 샘플링도 고퀄리키로 만드는 회사이니 손오공이 머리띠를 벗어낸 듯 신나게 하고있다.
전에는 이끼도 적당히 껴있고 플랑크톤이나 날파리도 뭐 아껴먹으면 살만한 따듯한 우물 안에 있는 개구리 왕이었다면 여기는 강물이고 나는 아직 어종을 알 수 없는 치어다. 급류도 흐르고 왼쪽으로 흘렀다가 오른쪽으로도 흐르다가 불었다가 말랐다가, 더 큰 바다로 나아가기 위해 수많은 경우의 수들을 시도하는 거칠고도 풍족한 곳이다. 일단 골수까지 뽑히는 느낌이지만 뽑힐 수록 내 골수양은 더욱 많아진다. 말은 호기롭게 이렇게 했지만 진짜 개 힘들고 외롭고 슬프고 처절?하다. 디자인하면서 그런 기분을 느껴가면서 생존하려고 해 본 적이 없다.
계속 나를 깨고 (내가 좋다는 도면의 수준을 넘어야함) 미의 기준을 바꾸고 사고의 영역이 넓어지는 트레이닝을 통해 세상을 보는 시각이 달라진다. 공학과 디자인이란 언어와 뉘앙스 혹은 표현의 차이지 같은 현상을 이야기하던 것 처럼 말이다. 하튼 노력이라던가 예쁘다는 기준을 바꾸는 연습 중이다. 예쁘다와 사고싶다는 별개라는걸 이해야한다. 그러나 태생이 다르고 그런 판에 있던 사람이 아니기에 이해가 안된다.
이 곳이 대단한 것은 각 분야의 고수들이 즐비하다. 바로 옆 자리 분도 여러 아이웨어 브랜드를 런칭하고 히트친 경력자, 앞자리 분도 유명 수입브랜드 팀장경력 10년의 베테랑, 공장 마스터들과 해외 유명 패션스쿨 출신들 등등 정점을 찍은 자들이 주변에서 같이 일하고 있다. 내가 여기 있어도 되나 싶기도 하지만 이유가 있어서 올 수 있었으려니 생각하고 지금이라도 나도 그 쯤은 돼야겠단 오기가 생긴다. 이게 원동력이다. 의외로 그 사람들도 까이고 힘들어한다. 다들 눈빛이 건조하다.
디자인도 중요하지만 사고싶다는 욕망과 소비자 심리에 회사가 조금 더 초점이 맞춰져있는데 그렇게 회사는 두 파트로 나뉘어있는 듯 하다. 제품과 욕망. 지금 시대는 다빈치처럼 명작을 몇십년에 걸쳐 그리고 만드는 것 보다 앤디워홀처럼 빠르게 이슈화시키고 자신의 끌어올려서 제품을 '사고싶게' 만드는 것이 유효타를 날리는 듯 하다. 하나를 사고싶게 만드는데 까지 무한한 급류를 지나는 과정을 거친다. 선 하나와 광이 나는 느낌 하나까지 굉장히 디테일하게 끝까지 잡아서 끌어나간다. 끝까지 팔로우 할 힘이 없거나 디렉팅하는 사람의 흥미를 끌지 못한다면 여기서는 굿바이다. 머 어느 작은 회사나 마찬가지다. 구멍가게에서 조차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이 어디 큰 곳이라고 좋은 소리를 듣겠나.
판매를 보는 시선의 변화. 타이밍
내가 가장 처음에 생각했던 제품에 대한 생각은 디자인과 품질이 우수한 웰메이드 안경을 만들어 이를 인정하고 알아봐주는 사람에게 나의 진심과 시간, 능력을 판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만 있는걸 찾으려 계속 디깅했다. 독자적인 나만의 영역을 구축하고 싶었다. 경쟁에서 살아남는 다기 보다 경쟁없는 나만의 섬이 좋았다.
그러나 커머셜한 판으로 들어와 디자인한 제품들이 좀 팔리기도 하고 품질이나 퀄리티 이슈에서도 벗어나는 제품을 만들 즈음, 어떻게든 좋은 제품으로 판매를 이끌어내겠다고 작정 하고 전투하듯 일에 심취해있었다. 모의고사 보듯 매출로 실력을 가늠하고 싶었다. 삼 년이 지났고 디자인이나 품질 이슈 혹은 가격적인 측면에서 좋아졌다는 평은 들었으나 매출은 요지부동이었다. 아니 되래 떨어졌는데 디테일한 수량 발주와 공장 컨트롤로 인해 나가는 돈이 확 줄었으니 순 이익은 더 남긴했다. 나는 매 달 거르지않고 제품을 출시해왔고 물건도 좋아졌고, 상황에 필요한 제품들을 뽑아냈는데 몇 년 전에 대충대충 중국 샘플이나 그대로 발주하던 사람이랑 매출이 같다는게 자존심 상했다. (대신 그 때는 재고가 많이 남았다.) 물론 코로나 이슈가 크다고들 했지만 슬슬 지쳐가고 있었고 마지막으로 새로운 브랜드를 만들면서 나를 갈아넣고 나왔다. 그리고 당시 경기탓이라고 하기에 왜 어떤 것들은 잘나가고 똑같이 이쁜 이건 왜 안나가는지 알 수가 없었는데 그 이유는 다음 회사에서 알게 되었다. 이건 큰 회사에서만 배울 수 있는 부분이었다. 얄밉지만 룩 출신 전임 팀장이 했던 이야기와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
전에는 직접 데이터를 만들었다면 여기는 데이터 전문가들이 그 제품은 왜 안나가는지에 대해 레포트가 쫘라락 날라온다. 판매 데이타가 날라오니 어떤 제품이 어떻게 어디로 팔렸는지도 다 나온다. 그간 낑낑대며 영업사원에게 전화하고 데이터의 키가 될 특정 제품이 어떤 안경원에 누구 타깃으로 나가느냐고 물어봐야 관심도 없는데다가 늙은 영업사원에게서는 뻔한 소리만 돌아왔는데 여긴 일하는 분위기가 달랐다. 궁금증을 해결해주는 회사다. 왜냐면 워낙 많은 제품을 팔았고 별 거 다 만들었기에 데이터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저런 방식들을 다 트라이해본 듯 하다.
회사는 아직 도수테에서 풀 악셀을 밟지않아 이 부분에서 진지하게 사업을 키우면서 운 좋게 내가 들어 갈 수 있던거 같다. 어찌보면 이 쪽은 또 아직 할 일이 많다. 아마 바쁠 예정인데, 이건 송곳처럼 나갈 수 있는 기회다.
아이웨어를 통해 세상을 보는 시각이 분명 달라지고 있다. 디자인도 중요하지만 발매되고 이슈가 되는 ‘타이밍’이 가장 중요하다. 전 회사에서 꾸준히 냈다 뿐이지 외부에 광고라거나 어떤 홍보수단이란 전혀 준비하지 않은 채 감으로 이때다 싶으면 출시하던 것 들. 이게 팔려? 라 생각하고 리오더하지만 귀신같이 안팔리던 제품들의 문제는 모두 타이밍이었던 것 같다.
여기서 나는 어떤 타이밍에 제품을 내는지 몸으로 체득하는 과정이 남았다. 아마 몇 시즌이 지나고나면 확고해 질 것 같지만, 이 곳은 그렇게 루틴해보이지 않는다. 작은 컬렉션들과 정규 컬렉션 방대한 콜라보레이션이 빡빡한 일정으로 채워져 있으며 열명이 넘는 아이웨어 디자이너가 주에 1-4 개 씩 새로운 디자인을 뽑아내야한다.
요즘 나에게 중요한 ‘컨펌을 위한 디자인’은 정해져있지만 정해져있지 않다. 누구에겐 어렵고 누구에겐 어렵지 않은 부분이 바로 이 포인트인데, 컨펌을 내는 것도 사람이요 출시를 결정하는 것도 사람이기 때문이다. 관리자급들은 워낙 많은 디자인이 스쳐지나가고, 많은 생각을 하기 때문에 시간을 들여 디테일하게 짜 간 도면은 이미 그의 머리속에서 한번 스쳤기 때문에 식상할 수 있을 것이다. 상상의 여지를 줄 수 있고 적절한 타이밍에 들어간 아이디어 도면을 바리에이션 하면서 또 다른 아이디어도 러프하게 준비해 쌓아가는게 이 회사의 디이너로 살아남는 방법이 아닌가 싶다. 이렇게 그려간 디자인 도면을 어떤식으로 발전시키길 바라는지 수정요구를 보면 ‘선’을 직접적으로 알 수 있고 그도 무의식 속에서 그 선을 왜 그렸는지 따라 그리다보면 감을 잡아 갈 것이라 기대한다. 그 선을 이해하면 나는 이 판에서 몇 단계 올라선 어디쯤에 있을 거라 기대한다.
요즘 원래 그렇듯 이센스 음악을 많이 듣는데 writer’s block를 들으면 요즘 나와 비슷하단 생각이 든다. 아직 못 보여준게 많다. 새로운 툴들과 장비를 다루는데 시간이 드니 답답하다. 오른손을 묶고 사는 기분이랄까. 아기가 빨리 말이 트는 방법은 옹알이를 많이하는 거다. 물리적인 시간을 들이는 수 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