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os
2021.02.07 일기 본문
오래간만에 쓴다. 1월부터 정말 바쁜 기간이 일단락되고 이번 주말을 끝으로 '일단' 한 숨 돌렸다.

회사에서 인원이 부족한 상황에서 브랜드까지 늘어나고, 작년부터 기존 인원이 교체되면서 이상하게 바다의 부유물이 파도에 밀려들 듯 자연스레 나에게 일들이 밀려들어왔다. 그렇다고 그에 대한 대가가 더 생기지는 않았다. 자고로 책임이란 조금 더 책임감을 느끼는 사람에게 흘러가 쌓이는 것이었다. 보통 조금 더 약은 부류의 직장인들은 그런 부유물이 본인에게 오지 않도록 손을 휘휘 저어 다른 곳으로 흘러가게 만들 뿐이었다.
갓난아기는 사랑스럽지만 나의 신체는 그 넘치는 에너지를 받아들이기에 그리 젊지 않았나 보다. 나의 퇴근 후를 아내가 최대한으로 배려를 해 줘도 우리의 피로가 해소되지 않기는 매한가지였다. 두세 시간마다 잠을 깨서 삼십 분, 길게는 한 시간씩 깨 있다 보니 머리는 전처럼 날렵하게 돌지 못했으며 출근 중이나 퇴근 중이나 회사나 집이나 그저 쉬고 싶다는 생각들만 간절했다.
이게 스트레스 때문인지 몸은 부어갔고 뇌는 아둔해져 알코올만 원했다. 아내가 집에서 고군분투하면서 혼자 아기를 보고 있을게 뻔한데 개인 작업이라고 나가기 체력적으로나 인간적으로 쉽지가 않다. 나야 돈 벌어 온다고 바깥바람이라도 쐬지만 아내는 내내 좁은 집에서 점점 무거워지는 아기와 버틴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텍스트로 보니 엄청 힘들어 보이지만 그 정도는 아니고 아기가 잘 보채지 않아서 우리를 많이 도와준다. 눈빛을 보면 니들 힘든 거 다 안다는 그런 표정)
공동 작업실을 시작한 단 하나의 이유인 안경 작업은 이런저런 이유들로 질척거렸으며, 나는 아직도 성취감을 느끼지 못했다. 작년에 개인적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으며 많은 에너지를 쓰면서 지금껏 채워지지가 않은 것 같다. 결국 같이 가던 친구에게 하고 싶은 방향으로 먼저 쭉 가보라고 하고 난 현실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고 돌아가기 위해 일단 한 발 뺐다. 제품 만들려고 모아 둔 돈은 마이너스가 된지 오래, 작업실을 유지하기 위한 지속적 지출만이 남았다. 작업실에서 만들 아세테이트 값과 월세나 급히 충당하자는 미명 하에 펀딩도 하고, 다른 브랜드 콘텐츠 기획까지 하면서 에너지가 완전히 고갈 나 있던 거 같다. 두 명이 벌어 둘이 살던 집을 나 혼자 벌면서 셋이 살아야 하는 상황에서 이래저래 벌린 일이 많았고 잘해야 했다.
이럭저럭 1월이 지나갈 쯤에는 '내가 좀 이상하다'라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고 사람이 예민해졌으며 문득 스치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초조함에 쫓기며 뭔가에 짓눌려있던 누군가 보이는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돈을 못 벌어도 퇴사를 해야겠다는 생각만 꽉 차있었고, 반면에 나가는 일 또한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있었다.
인스타그램도 허무했다. 펀딩 때문에 만든 계정으로 관련도 없는 사람들에게 팔로우를 걸고 말을 걸고. 지겨웠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일도 지겨워졌다. 펀딩이 끝나고, 내 작업 계정으로 돌아와 보니 결국은 다 남에게 보여줌으로써 있어 보이기 위한 행위인데 속으론 텅 비어있고 좋은 생각도 하지 못하는데 무슨 '멋지고 깨어있는' 작업을 하는 양 올라와 있는 사진들도 부질없다 생각됐다. 피드를 쭉 내려가 보니 열심히 했다며 올려 둔 것들이 많았는고 무슨 소용인가 싶어서 사진 절반은 지우고 텍스트도 없애버리고 아이웨어 계정 팔로우도 끊었다.
연초는 회사 신모델이 계속 들어가고 샘플이 나와야 하는 기간인데, 혼자 테크니컬 드로잉까지 그리려니.. 낮에는 밀려드는 사사로운 업무를 하느라 아내가 친정에 가 있는 일주일 동안 매일 택시 타고 가면서 야근으로 본업들을 끝냈다. 아, 지난주에는 이직 가능성이 있는 다른 회사 과제까지 하느라 일들이 모두 끝난 이후 매일 새벽 2시 3시까지 커피를 입에 달고 도면 치다가 잠들고. 잠에서 못 깨서 지각하면서 혓바늘은 내내 돋아있는 시간을 보냈다.
이럭저럭 폭풍 같던 1.5달 정도가 지나고 오늘은 2월 첫째 주 주말. 핸드폰도 꺼놓고 애기랑 놀아주다가 애가 낮잠 잘 때 같이 좀 쉬고나니 살것같다.
펀딩도 끝났고, 브랜드 콘텐츠 개발도 어느 정도 자리가 잡혀간다. (콘텐츠 개발은 결국 우리 프로젝트를 풀어나가는데 지대한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한다.) 아기는 이제 꽤 통잠을 자서 우린 새벽에 한두 번 정도만 깨도 괜찮게 됐다.(고 썼는데 오늘은 또 새벽에 여러번 깸) 다른 회사 과제는 제출했고, 나름 최선을 다 했으니 돼도 좋고 안돼도 좋다는 생각에 그냥 마음이 편해졌다.
'어떻게든 되라지!'
과제는 썩어있던 나에게 좋은 자극이 되었다. 이 과제를 하듯 타깃을 설정하고 몰두해서 그리면 더 좋겠다. 이런 시간들이 쌓이면 결국 내가 할 일들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겠지.
용의 꼬리 뱀의 머리냐 결정은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니게 돼서 마음이 편해졌다. 그저 이런 몰입도로 제품을 만들자는 마음가짐을 얻었으니 이제 본업인 작업실로 돌아가 다시 힘을 낼 수 있는 에너지원이 되었다. 아주 오래간만에 오늘 저녁엔 애기가 잘 자서 일기도 끄적거릴 수 있음에 감사하다.
타인이 객관적으로 나의 작업을 보고 판단할 일이 잘 없다. 으레 주변의 지인이거나 취향이 비슷한 사람들만이 나의 작업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해주기 때문이다. 듣기 좋은 것들만 듣고 싫은 소리에는 자존심 상한다. 최대한 예뻐 보이고 그럴듯한 각도로 작업 사진을 찍어서 올려댄다. 이런 허무한 단계에서 한 두 계단 더 올라가 말들에 휘둘리지 않으면서도 잘 받아들이며 껍데기가 아닌 속으로 좋은 작업을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떤 글귀가 와 닿아서 메모해둔다.
무위 - 보통 인간 사이에서 발견되는 인위적 행위, 과장된 행위, 계산된 행위, 쓸데없는 행위, 남을 의식하고 남에게 보이려고 하는 행위, 자기중심적인 행위, 부산하게 설치는 행위, 억지로 하는 행위, 남의 일에 간섭하는 행위, 함부로 하는 행위 등 일체 부자연스러운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오늘 아내가 어디서 나와 우리 부부 내외 사주를 들어왔는데 재미있었다.
나는 병화(가장 강한 불)의 사주고 아내는 갑목 이라는 강한 양의 기운을 가진 나무의 사주인데 태양이 나무를 쬐는 형세 혹은 내가 너무 뜨거워지면 이를 식혀주는 나무의 그림이라 상성이 아주 잘 맞는다고, 우리는 재산은 먼지가 쌓이듯 계속 불어만 갈 테니 돈 걱정은 하지 말라 했단다. 인생에서 가장 힘들 때는 지금이라고 계속 더 좋아질 일만 있다고 하니, 뭐 그렇게 힘든지 잘 모르겠는데 이게 제일 힘든 거라니 꽤 위로가 되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내가 결혼하고 나서 커리어 관련한 이직, 회사, 작업 때문에 꽤 스트레스받아하니 아내가 그것도 물어봤는데 올해는 다른 회사로 옮기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2022년에 확실히 내가 인정받을 단단한 자리로 가게 된다. 2021년은 어찌 되든 그 자리로 가기 위한 통로니 그냥 지금 하는 일들에 최선을 다하라 했다. 그래서 올해 이직을 하냐 마냐 물어봤다고 하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지금 회사건 이직을 하건 그만두던, 무조건 내년에 강한 이동수로 넘어 간 그 직책의 자리가 맞는 자리고 잘 해내는 자리라고. 그래서 나의 작업실 사업은 잘 되어가느냐 물어봐도 점 봐주는 할머니는 따스하게 웃으며 그것들이 쌓여나가 결국엔 본인 일 하면서 성공할 사주니 하고 싶은 대로 놔두라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나는 어려워 하는 사람들을 더 도와주고 싶어해, 고생 좀 한다고 했단다. 말이 좋아 착한거지 어찌보면 호구랄까.
될 일들은 될 테니 요행을 바라지 않고 자연스럽고 꾸준히 해 나가면 된다.
'dia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치관 (0) | 2021.02.16 |
---|---|
kyeol (2) | 2021.02.10 |
2021 안경업계와 브랜드 현황 (0) | 2021.01.30 |
2021.01.28 (0) | 2021.01.28 |
MD, DJ, curator and editor (0) | 2021.01.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