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 이반일리치의 죽음을 읽고.
이 책은 이태리로 가는 비행기와 프라토라는 동네에서 다 읽은 짧은 책이다. 내가 고전을 선택한 이유는 한참 성공 서적과 세속에 빠져있는 나에게, 커리어상의 정상과 소유한 집이 비싸지고 커짐을 꿈꾸는 나에게 질문을 하고 싶었다. '정말 이렇게 살아도 좋은가' '이다음엔 무엇이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던 차였다. 아래 사진은 밀라노에서 들렸던 부잣집이다. chill하고 정말 좋았던 기억. 집앞에 이런 수영장이 있고 푸른 정원이 있는 삶을 꿈꾸는 모든이들이 불행해 질 필요는 없잖은가?
이반일리치의 삶은 가분하고 성공가도를 달리는 듯했으나, 집 인테리어 중 옆구리를 다치면서, 혹은 아무 상관없이 언젠가부터 아프기 시작고 그로 인해 사망에 이르는 짧은 이야기다.
나는 이반일리치의 삶을 보며 내가 살고 싶던 삶이자 내가 걷고있는 길이라 생각이 들었으며 톨스토이의 강력한 점이란, 이런 허구적 인물을 통해 200년이 지난 나의 삶에 어떤 물방을 울 떨어뜨려 삶의 파동을 만들어 낸다는 것에 그가 역시 세기를 아우르는 이야기의 대가라는 것을 새삼 느끼는 바이다. 이반 일리치의 집은 세련되게 장식되었지만 형식과 사회적 기준에 지나치게 관심이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는 그가 외모와 사회적 용인과 모습에 집착하는 것을 반영하는데, 그의 집은 패셔너블하면서도 비인격적인 스타일로 배열되어 있으며, 이는 그가 사물이 제공할 수 있는 따뜻함이나 개인적인 편안함보다는 이미지적으로 보임을 중시한다 할 수 있겠다.
예를 들어, 톨스토이는 거실이 "특정 계층의 다른 사람들처럼 보이길 원하는 당시의 스타일"로 장식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잘 정돈된 값비싼 가구로 가득 차 있지만 개인적인 취향이랄 것은 없는.. 이는 이반 일리치의 지위 추구와 삶에서 진정하고 의미 있는 관계로부터의 거리감을 반영한다. 따라서 집은 이반의 가치관의 공허함과 그의 사회적 열망의 공허한 성격을 상징한다. 반면 나는 그런 이반 일리치 처럼 살고 싶었다. 성공한 법조인 자기 집을 트렌디하게 꾸미는 인간. 사실 너무 트렌디하다 보니 그 누구와 차이도 없는 그런 집이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유튜브에서 집들이 방송을 보면서 군침 흘리는 아이템들이 절묘하게 들어가 있는 그런 집. 가끔 있는 빈티지와 인테리어 업체와 협의한 미니멀한 공간 유니크한 포인트들. 현대판 이반 일리치. 내 커리어로 성공한 인간, 값비싼 취미와 집, 가족들의 편안함과 행복함. 내가 갈구하던 그것들은 현대사회에서 허세나 허영이라 쓰이지만 인간본성에 있는 욕망들이다. 욕망을 실현하려는 노력이 나쁘다고 할 수 없지 않은가?
이반은 급격히 아파지면서 화딱지 나던 가족들의 모습이 점점 안쓰럽고 가여워 보이면서 이반이 생각하는 삶의 정답을 깨닫는다. 삶은 외부에서 보이는 모습과 승진, 재산, 규범에 있는 것이 아니고 연민, 사랑, 진실을 찾는 과정에서 나온다는 것을. 그리고는 죽는다.
이후 내용은 끝나지 않고 자연스럽게 그가 죽고 난 후의 이야기가 흐르는데 아무 일 없다는 듯, 그가 빠진 공석에 들어갈 다음 사람들의 기대, 재산을 물려받을 아내의 궁리 등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모습들이 공장의 타이밍 벨트 위를 흘러가며 끝난다.
이 책의 결론과 별개로 나는 아직 나의 결론이 나지 않았다. 이반 일리치는 가족을 가엾이 여기며 자신의 이기심이 아닌 타인의 욕망 혹은 타인의 상황을 인지하며 이 이야기는 마무리되지만 아직 나에게는 와닿지 않는 이야기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포르셰를 꿈꾸는 게 맞지 않는다는 말일까? 좀 더 사랑하고 살라는 이야기인데 그것은 어떤 깨달음이 있기 전에는 쉽지 않은 일 아닐까. 특히 나처럼 감정적으로 플랫 한 사람에게? 이반 일리치처럼 죽음에 가까워져서 그 깨달음을 얻기에는 너무 안타깝지 않은가.
모두 쟁취할 수는 없을까? 정답을 깨달은 이반과는 달리 나는 아직도 답을 찾는 중이다. 그러기에 이 글은 이후로도 많이 수정될 확률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