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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적 부르주아

beos 2026. 6. 29. 16:34

 

에리히 프롬은 현대인을 '보편적 부르주아'라고 불렀다. 계급의 문제가 아니다. 재산이 많고 적고를 떠나, 대부분의 사람이 소유의 논리로 삶을 운영하게 됐다는 거다. 더 갖고, 더 쌓고, 그걸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방식. 프롬은 이걸 '갖는 양식'이라고 했다. 물건만이 아니다. 지식도 갖고, 관계도 갖고, 성과도 갖는다. 그리고 그게 어느 순간 자기 자신이 된다.

반대편에 '있는 양식'이 있다. 소유가 아니라 경험의 질 자체에 반응하는 상태. 결과를 확보하는 게 아니라 행위 안에 있는 것. 프롬은 갖는 양식으로는 존재를 채울 수 없다고 했다. 더 가질수록 다음 것을 원하게 되는 구조니까.

 

부동산 관련 글을 하나 읽었는데, 글의 요지는 이랬다. 실거주 중심으로 시장을 재편하면 전월세·이동성·공급이 동시에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 다주택 보유 비용을 높이고 투기 수요를 억제하겠다는 방향은 여러 정부에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의도와 결과는 늘 달랐고, 결국 가격은 금리와 심리가 결정했다.

읽으면서 든 생각은 하나였다. 한국에서 집은 갖는 양식의 가장 선명한 형태라는 것. 정책은 그 구조를 바꾸려 하지만, 소유로 불안을 달래온 오랜 습관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시장이 문제가 아니라 심리가 문제인데, 심리는 법으로 고쳐지지 않는다.

 

나도 더 큰 집, 더 균질한 인간이 있는 곳으로 가고싶다. 나 또한 있는 양식을 원하면서도 갖는 양식의 사고를 한다.

 

인간관계, 시간, 취향까지 일과 연결되면 — 일을 빼고 나서 내가 잘 안 보인다. 디자이너인 나도 그렇게 됐다. 서서히, 모르는 사이에. 성과가 쌓여도 채워지지 않았고, 공허해서 나를 찾으러 출발점으로 돌아갔다. 뭘 좋아하는 사람이었나.

 

지금 일은 좋아서 시작했고, 잘 됐고, 일이 됐다. 일이 되니까 성과가 붙었고, 소유의 논리가 들어왔다. 공허해져서 나를 찾으러 갔더니 출발점이 다시 거기였다. 도돌이표다.

 

처음은 달랐다. 프레임을 손으로 만지고, 비율을 조정하고, 설계하는 그 행위 자체가 재미있었다. 결과와 상관없이. 그게 살아있던 건 초반까지였던 것 같다. 내 디자인 하나씩 출시될 때, 그 순간들. 성과를 확인하는 게 아니라 뭔가 세상에 나오는 걸 지켜보는 감각. 지금 생각하면 그게 ‘있는 양식’에 가장 가까웠던 시간이었다.

 

이후로 지금까지는 조금씩 다른 것이 됐다. 좋아하는 대상에서 운영해야 하는 대상으로. 경험에서 자산으로. 도돌이표가 고통스러운 건 탈출하려는 방향이 같은 장소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근데 막힌 구조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게 문제가 아니라, 그걸 대하는 방식이 바뀐 거니까.

질문은 조금 바뀌었다. 뭘 좋아하냐가 아니라 그 때의 감각을 기억하는가. 그 감각이 살아있던 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 그게 시작이다. 그래서 처음 시작했을 때 처럼 손으로 하나 만들어봤다. 생각처럼 디테일하게 마무리되지 않은게 답답하긴 하지만, 여기까지 재미있게 했다는데 집중해보고 그 기분을 다시 생각해본다.

 

 떨어진 감흥과 감각을 올린다. 떨어진 의지가 올라온다. 뭔가 하고싶은 마음이 들면서 집중하고 흥미를 느끼게 된다. 이게 단지 신경전달물질만의 이슈라는게, 사람이 어쩔 없다는 것이 허탈하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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