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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 에너지. 친절

beos 2026. 10. 9. 18:14

얼마 전 사고가 나서 차를 수리 맡겼다. 덕분에 요즘은 대중교통을 타고 다닌다. 바깥 구경하면서 다니는건 좋은데, 그러다 보니 보기 싫은 것들을 너무 오래 보고 있어야 한다. 긴 배차간격을 견뎌 탄 꽉 찬 버스. 옆에 서 있는 사람의 담배 쩐내, 귀에 박히는 통화 소리, 내 쪽으로 기울어오는 백팩. 내가 선택하지 않은 것들을 가까이에서 계속 견뎌야 한다.

친절에는 에너지가 쓰인다. 그래서 여유가 있어야 한다. 금전적 여유, 시간적 여유, 심적인 여유.

내 차를 운전할 때는 깜빡이를 켜고, 들어오는 차를 위해 브레이크를 잠시 밟아주는 정도가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친절이었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그런데 버스에 승객으로 타면 다르다. 자리를 비켜줘야 할 것 같은 노인이 있고, 비키지 않는 백팩남이 있고, 수많은 소음과 냄새가 있다. 이런 것들을 계속 참으며 모두에게 친절하기란 쉽지 않다.

친절은 여유에서 온다.

내가 시간이 있으면 길을 물어보는 사람에게 천천히 설명해줄 수 있다. 돈이 많으면 받을 돈을 생각하지 않고 누군가를 도와줄 수 있다. 마음에 여유가 있으면 사소한 무례에도 굳이 반응하지 않을 수 있다.

반대로 여유가 없는데 먼저 친절하려고 하면 그 순간순간 기력이 빠진다. 그러면 정작 필요할 때 귀 기울일 힘, 중요한 일 앞에서 끝까지 집중할 힘이 남지 않는다.

그렇다고 나는 친절하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 오히려 나를 위해서라도 친절하고 싶다.

그러려면 먼저 내 에너지 그릇을 키워야 한다. 체력을 만들고, 시간을 확보하고, 돈에 쫓기지 않고, 불필요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상황에 있어야 한다.

물론 에너지 그릇을 빚는 것조차 에너지가 든다. 그래서 한꺼번에 모든 것을 바꾸려고 하기보다, 내 에너지를 빼앗는 것부터 하나씩 줄여야 한다.

그래서 가장 먼저 줄일 것은 SNS다. thread에는 내 인생에 아무 의미 없는 것들이 계속 뜬다. 기왕이면 의미 있는 것을 볼 수 없을까, 단 1%라도 좋은 것들이 쌓이게 할 수 없을까 생각해봤지만 그런 방법은 없다. 알고리즘은 나를 성공시키거나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 의도가 전혀 없다. (그런걸 만들어 버릴까) 내가 오래 머물 만한 것을 보여줄 뿐이다. 내 시간을 갉아먹고 헤매게 만든다. 그러니 알고리즘을 바꾸려고 애쓰기보다, 내가 줄이는 게 쉽다. SNS는 아예 삭제해야 한다.

내 시간과 주의력을 아무에게나 내주지 않는 것. 결국 이것도 같은 이야기다. 친절도, 시간도, 돈도, 집중력도 모두 한정된 자원이다. 어디에 쓸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알고리즘 이야기가 나온 김에 같은 원칙이 AI를 쓰는 방식에도 적용된다. 요즘은 AI를 단순히 질문을 던지는 곳이나 일기장처럼 쓰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오늘 무슨 생각을 했는지 기록하는 것보다, 그 생각을 가지고 실제로 내가 무엇을 바꿀 수 있는지를 찾아내는 데 쓰고 싶다. 내가 반복해서 고민하는 것, 쓸데없이 신경 쓰는 것, 계속 에너지를 빼앗기는 것, 반대로 나를 강하게 만드는 것들을 보고 내가 조금씩 더 나은 선택을 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필요하다. 다 지우고 그거만 남겨보고 싶다.

내가 되고 싶은 건 에너지를 아끼는 사람이 아니다. 불필요한 것에는 덜 쓰고, 중요한 사람과 일에는 더 쓰고, 여유를 최대한 만들어내 그 여유를 다시 친절로 돌려주는 사람이다.

내가 말하는 '에너지 그릇을 키운다'는 것도 결국 그런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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