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미의 정의는 무엇이고, 미와 추를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무엇을 진정한 미라 할 수 있는가?

아름다움에 대해 알고 싶어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아름다움의 의미를 알기 위해 세상 곳곳을 여행했으나 어디서도 만족스러운 해답을 얻을 수 없었다. 철학자와 종교인들은 추상적인 답변만 들려줄 뿐이었다. 마침내 그는 지혜로운 현자들이 산다는 히말라야로 발길을 돌렸고, 그곳의 어느 동굴에 아름다움의 의미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며칠 동안 험한 산길과 바위를 오른 끝에 남자는 높은 산정에 위치한 동굴 입구에 도착했다.
동굴은 어두워서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았다. 남자가 동굴 안을 향해 소리치자 뜻밖에도 늙은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엇을 원하는가?”
아름다움의 의미를 알기 위해 왔다고 말하자, 여인은 그를 동굴 안으로 초대했다. 사람들이 말한 현자는 바로 그 늙은 여인이었다.
여인은 남자의 질문에 열정적으로 답했고, 남자는 며칠 동안 그곳에서 생활하며 그녀로부터 아름다움의 본질에 관한 모든 강의를 들을 수 있었다. 미의 개념과 정의, 미를 식별하는 법, 역사 속 미에 관한 다양한 이론 등, 여인은 자신이 가진 지식을 아낌없이 전수했다.
그런데 동굴 속 어둠에 차츰 눈이 익숙해진 남자는 어느 날 지금까지 본 어떤 여성보다 추한 몰골을 한 그녀의 모습을 보고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희미한 불 앞에 웅크린 그녀의 얼굴은 습기 찬 동굴 탓인지 온통 사마귀투성이였고, 제멋대로 자란 덧니는 입술 밖으로 삐져나와 있었다. 동굴 안의 퀴퀴한 냄새도 그녀의 불행한 체취가 밴 것이었다. 등은 굽었고, 눈동자는 공허했으며, 이마는 주름으로 가득했다. 오랫동안 감지 않아 머리카락도 마구 헝클어져 있었다.
어두운 동굴 안에는 그녀의 모습을 비춰볼 거울이 전혀 없었다. 모닥불 불빛에 동굴 벽에 비친 그녀의 그림자가 전부였다. 그 그림자는 실제 모습과 달리 신비로웠고, 여인은 자신의 손짓과 동작이 만들어내는 그 아름다운 그림자에 매료된 듯했다. 아름다움에 관한 그녀의 지식은 모든 면에서 완벽에 가까웠다. 다만 말할 수 없이 추한 그녀의 실제 모습이 슬프고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떠날 시간이 되자, 가르침에 깊이 감사한 남자는 여인에게 물었다.
“그동안의 가르침에 무엇으로 보답하면 될까요?”
그러자 여인은 말했다.
“나를 위해 그대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다. 세상으로 돌아가 나에 대해 말할 때, 내가 매우 젊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다고 말해 다오.”
진실은 때로 그 뒤에 추한 거짓을 감추고 있다. 동굴 속 여인이 아름다움에 대해 말하지만 실체는 추한 몰골인 것처럼, 진리와 정의에 대해 완벽한 논리를 전개하면서도 우리의 실제 모습은 그것과 거리가 멀 때가 많다.
디자이너인 나는 어떠한가? 내가 선에 담으려고 노력하는 아름다움과 나 자신의 아름다움은 얼마나 일치하는가? 인간적인 불완전함을 제외하더라도, 내가 말하는 진리가 내 행동 속에서 스며나오기를 바란다. 선에 표현된 내가 본연의 나를 능가하지 않기를. 빛도 들어오지 않는 동굴 속이 아니라 푸른 하늘 아래에서 인생을 이야기할 수 있기를. 그리고 나는 충분히 나 자신이기를 희망한다.
삶이 말을 걷어올 때, 우리는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타인의 정답이 아니라, 자신의 정답을.
행복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행복에 이르는 길, 행복의 조건, 행복의 비밀에 관한 강의를 듣고 책을 읽는다. 언제든 행복할 수 있다는 것도 안다. 부족함에서 행복을 찾아야 한다는 것, 삶이 베푸는 것에 자주 감탄하고 몰입해야 한다는 것도 잘 안다. 풀꽃 한 송이, 봄 햇살, 차 한 잔에서 감사와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도. 그러나 그것들은 우리가 쉽게 외면하는 우선순위의 바깥에 있다.
현실 세계로부터 고립되어 논리만이 지배하는 세계에 갇혀 자기 목소리의 메아리에 도취된 동굴 속 여인은 어쩌면 우리의 자화상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