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허무함과 하루키의 러닝 철학
1.

젠틀몬스터에서 25년 1월 초 주얼리 컬렉션을 런칭했다. 24년 초겨울부터 반팔을 입을 때까지 준비했던 컬렉션이다. 내 감정은? 어쩐지 모를 허탈, 허무랄까. 텅 빈 느낌이다. 오래전에 끝났던 창작 과정이 이제 다른 팀들과의 멋진 협업을 통해 세상에 나왔는데, 궁금하고 기대되는 마음도 있지만 한편으로 이상하게 꽤 지쳤다. 컬렉션을 준비하고 끝낸 뒤에 뒤따르는 공허함을 미뤄뒀다가 이제야 직면한걸까. 아니면 뭔가 마음에 안 드는 걸까. 잘 모르겠다. 딴 소리지만 회사에서는 이런 감정을 드러내지 말자.
2.

요즘은 무거운 책을 들고다니기 좀 불편해서, 편하게 에세이를 읽는데 거기서 드는 생각과 위의 생각과 얽혔다. 그 책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러닝에 대한 에세이 '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what I talk about when I talk about Running)' 다. 하루키는 소설을 쓰기 위해 러닝을 한다. 소설을 쓰는 일은 막일에 가깝기 때문에 체력이 필요하다는 게 그 이윤데, 삶이 러닝 반 작가 반으로 이루어진 반 마라토너다. 누군가에겐 디자인도 영감이 스치고 순식간에 나오는 과정이겠지만, 나에겐 아니기에 그 관점이 하루키의 철학이 와닿았다. 삶, 소설을 쓰는 행위, 디자인, 러닝은 모두 연관이 있다고 느껴진다.
- 소설을 쓰는거나 디자인을 하는 데는 재능, 집중력, 지속력이 필요하다. 나처럼 재능이 별로 풍부하지 않다면 스스로 어떻게든 근력을 쌓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훈련에 의해서 집중력을 기르고 지속력을 증진시켜 간다. 지속력으로 버티며 재능의 대용품으로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 운이 좋다면 그렇게 해서 견뎌 나가는 사이에 내 안에 감춰져 있던 진짜 재능과 만날 수도 있다.
- 계속하는 것, 리듬을 단절하지 않는 것. 일단 리듬이 설정되면 그 뒤는 어떻게든 풀려 나간다. 그러나 탄력을 받은 바퀴가 일정한 속도로 돌아가기 시작할 때까지는 계속 가속하는 힘을 멈추지 말아야 하는데, 물리 용어로 '최대 정지 마찰력'을 넘기는 것이 어렵지, 그것을 넘기면 지속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쉬울 수 있다는 말과 같다. 이는 운동, 디자인, 습관에 모두 적용된다. 그 지점을 넘어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매일 계속하면, 거기에 관조와 같은 것이 우러난다. 서머셋 몸은 "면도의 방법에도 철학이 있다"라고 했으니 말이다. 만약 잠시 멈춘다면 우리의 몸은 영악해서 자동적으로 한계치를 떨어뜨리는데, 근육도 살아 있는 동물처럼 가능하면 힘 안 들이고 살고 싶어 하기에 무게가 주어지지 않으면 안심하고 기억을 지운다. 오늘 쌓는 걸 멈춘다면 다음은 더 힘들어진다.
- 같은 10년이라고 해도, 멍하게 사는 10년보다는 확실한 목적을 지니고 생동감 있게 사는 10년 쪽이, 당연한 일이지만 훨씬 바람직하고, 달리는 것은 확실히 그러한 목적을 도와 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주어진 개개인의 한계 속에서 조금이라도 효과적으로 자기를 연소시켜 가는 일, 그것이 달리기의 본질이며 (디자인 과정의 본질이며), 그것은 또 사는 것의 메타포이기도 한 것이다.
- 중요한 것은 시간과의 경쟁을 하는 것이 아니다. 어느 만큼의 충족감을 가지고 42킬로를 완주할 수 있는가, 얼마만큼 자기 자신을 즐길 수 있는가, 아마도 그것이 이제부터 앞으로의 큰 의미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 아닐까. 수치로 나타나지 않는 것을 나는 즐기며 평가해 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제까지와는 약간 다른 성취의 긍지를 모색해 가게 될 것이다. 맞다. 디자인을 하고 일하는 과정은 경쟁이라기보다는 나 자신이 얼마나 충족감을 가지고 결론에 이르렀는지, 그 과정 속에 내 인생관은 어떻게 바뀌었는지, 나는 얼마나 더 성장했는지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 개개의 기록도, 순위도, 겉모습도, 다른 사람이 어떻게 평가 하는가도, 모두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러너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하나의 결승점을 내 다리로 확실하게 완주해 가는 것이다. 혼신의 힘을 다했다, 참을 수 있는 한 참았다고 나 나름대로 납득하는 것에 있다. 거기에 있는 실패나 기쁨에서, 구체적인 어떠한 사소한 것이라도 좋으니, 되도록 구체적으로 교훈을 배워 나가는 것에 있다. 그리고 시 간과 세월을 들여, 그와 같은 레이스를 하나씩 하나씩 쌓아가서 최종적으로 자신 나름으로 충분히 납득하는 그 어딘가의 장소에 도달하는 것이다. 혹은 가령 조금이라도 그것들과 비슷한 장소에 근접하는 것이다
뭐 그래도 이건 자신 있게 단언할 수 있는데, '좋아 이번에는 잘 달렸다' 라고 하는 느낌이 회복될 수 있을 때까지 나는 앞으로도 기죽지 않고 열심히 디자인과 일에 몰두할 생각이다. 소설을 잘 쓰려면 달리기를 해야 하는 것처럼.